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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일상/2023

곤지암의 지명 유래

by 竹溪(죽계) 2023.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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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장군의 흔적을 따라 곤지암(昆池巖)의 지명을 살피다.

 

조선의 명장으로 임진왜란 시 탄금대 전투에서 패해 죽음을 맞은 申砬은 신라 말기에 弓裔를 몰아내고 고려 태조인 王建을 추대하고, 甄萱과 싸웠던 八公山 전투에서 왕건의 목숨을 구한 공 등으로 개국 일등 공신에 봉해진 사람으로 平山申氏의 시조인 申崇謙의 후손이다. 그는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조선 최고의 무관으로 일컬어졌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문경 새재를 버리고 達川 평야에 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패하여 전사하였다. 이 패전으로 전쟁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고, 宣祖義州로 피난길에 오른다. 이렇게 되자 신립은 마치 만고역적처럼 취급되었지만, 조국을 사랑하고 목숨을 버린 조선 최고의 명장임을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립이 전쟁에서 판단을 잘못하게 된 데에는 그를 사랑하다 거절당해 죽은 처녀의 혼령이 복수를 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전설이 민간에 전해온다. 어느 날 신립이 사냥을 하다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인가를 발견했는데, 소복을 한 여인이 홀로 있었다. 그 여인의 집에 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자신의 가족과 종들을 모두 죽여 자신만 남게 되었다고 했다. 처녀는 종의 아내가 되든지 맞아 죽든지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신립은 종을 없애기 위해 그 집에서 묵었는데, 한밤중이 되자 종이 나타났다. 화살로 그 종을 쏘아 죽이고 처녀를 구해 주었다. 처녀가 자신은 의지할 데가 없는 처지라며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 신립은 자신은 혼인한 몸이라 청을 받아 줄 수 없다고 했다. 거절당한 처녀는 집에 불을 지르고 자결하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신립이 장인인 權慄에게 이런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잘못했다고 하면서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민간의 이야기일 뿐 실제로는 신립은 권율의 사위가 아니었다. 민간에서 그냥 가져다 붙인 것으로 보면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충주로 내려간 신립은 처음에는 문경 새재를 지키려고 했다. 그날 밤에 처녀의 혼령이 나타나서 탄금대에 진을 치고 싸우라고 꼬드기는 바람에 갑자기 바꾸었고 전쟁에 패했는데, 처녀의 혼령이 이렇게 해서 복수를 했다는 것이다.

 

경기도 廣州에 있는 곤지암(昆池巖)이란 지명은 신립 장군과 깊은 연관을 가진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곤지암 초등학교 정문 바로 옆에 있는 두 개의 바위에서 유래된 것이 소머리국밥으로 유명한 곤지암이란 지명인데, 신립 장군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묘소를 조성하는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신립 장군이 전투에서 패해 달천에 빠져 죽음을 맞았는데, 병사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한양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죽어서도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다가 운구하는 병사들이 장군님! 하고 부르면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서 利川을 지나 광주로 가기 위해 고개를 넘고 있었는데, 병사들이 또 장군님!하고 부르니 대답은 하지 않고 에헴하는 기침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곳을 기치미고개(기침고개)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곳은 4차선 도로가 지나고 있는데, 고개를 마구 파헤쳐 놓은 데다 아주 흉물스러운 구조물까지 설치해놓아서 눈으로 보기 민망할 정도다. 기치미고개라는 표지나 기념비 등이 아예 없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기치미고개를 지나 이천과 광주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를 다시 넘는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병사들이 다시 장군님!하고 불렀다. 그러나 신립 장군의 관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운구하는 사람들은 이 고개에서 장군의 넋이 나갔다고 하여 이름을 넋고개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 고개를 넘으면 긴 골짜기가 이어지면서 곤지암에 이른다. 이 고개 역시 산을 잘라 도로를 내는 바람에 아무런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근래에 둘레길을 조성하면서 이정표에 넋고개, 혹은 넓고개라는 표식을 해놓았을 정도다. 조선 말기에 의병이 왜군을 물리친 곳이기도 한 곳인데, 그 기념비는 조성해 놓았다.

 

넋고개를 지나 곤지암으로 향하던 병사들은 넋이 나간 장군의 시신을 더 이상 운구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지금의 곤지암읍 신대리 야산 기슭에 묘소를 조성했다. 그런데, 그 후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한을 풀지 못한 장군의 혼백이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발굽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품이 올곧은 선비가 그곳을 지나다 장군의 묘소에 가서 말하기를, 산 자와 죽은 자는 엄연히 세계가 다르거늘 장군은 어찌 죽어서도 산사람을 괴롭히느냐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면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옆에 있던 고양이 바위의 목을 쳐서 떨어뜨려 버리고, 그와 동시에 바로 옆에 커다란 연못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 뒤로부터는 말발굽이 떨어지지 않는 일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곳에 있던 바위는 고양이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猫巖이라고 불렸는데,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커다란 연못 옆에 있는 바위라고 하여 곤지암이라 부르게 되면서 그것이 지명으로 되었다.

 

바위의 바로 옆에 있는 곤지암 초등학교 자리가 연못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지금은 흔적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주변을 상가와 주택이 들어서서 참으로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되었다. 교통의 중심지이면서 소머리국밥 등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곤지암이란 지명의 유래는 간직한 유적임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버려져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가 막힐 지경이다. 글쓴이가 보기에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문화콘텐츠로 거듭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인데, 언제까지 버려두고 있을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곤지암에서 곤지암역을 지나 곤지암천을 건너서 산으로 올라가면 신립 장군의 묘역이 있다. 신립 장군의 묘사 조성된 후 이곳은 평산신씨 문중 산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이 줄줄이 잠들어 있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난 후 각 지자체에서는 이런 문화콘텐츠를 발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광주시나 곤지암읍은 예외인 것 같아 참으로 씁쓸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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