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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일상/2022

희방사의 역사적 의미

by 竹溪(죽계) 2022.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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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사(喜方寺)의 역사적 의미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목인 소백산 연화봉 아래에 자리한 희방사는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 있다. 신라 643년인 선덕여왕 12에 두운(杜雲)이 창건하였으며, 호랑이에 얽힌 창건 설화가 전하고 있다.

 

태백산 심원암에서 지금의 희방사 자리에 있는 동굴로 옮겨 암자를 짓고 수도하였다. 암자 아래에 호랑이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아 두고 항상 왕래했는데, 하루는 호랑이가 스님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마치 답답함을 하소연하는 시늉을 하였다. 스님이 살펴보니 호랑이의 목에 비녀가 걸려 있었다. 스님이 손을 넣어 빼주니, 호랑이가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흔들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시늉을 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호랑이가 큰 돼지를 지고 왔으므로 스님이 그 뜻을 헤아리고 새끼에게 던져 주었다.

 

하루는 호랑이가 오랫동안 나가서 돌아오지 않자 죽을 쑤어 그 새끼에게 먹였는데, 사흘이 지나서 스님이 밤에 염불을 외고 있노라니 호랑이가 또 어떤 물건을 지고 와서 내려놓았다. 스님이 불을 켜고 보니 아리따운 처녀였다. 몸에 상처가 없었으므로 그대로 온돌에 누여 간호하니 이윽고 깨어났다. 그 사는 곳과 성씨를 물으니 경주 상호장(上戶長) 유석의 딸이었다.

 

겨울이 지난 뒤에 스님이 남자 복장을 하게 하여 데리고 그 집을 찾아갔는데, 그 집에서는 한창 무당을 불러 놓고 푸닥거리를 하는 중이었다. 얼마 뒤에 여종이 나와서 보고는 들어가 그 주인에게, “저 스님의 상좌(上佐)가 우리 낭자와 흡사합니다.” 하였다. 그 아버지가 나와서 보니 과연 그의 딸이었다. 드디어 안고서 통곡하고 스님을 맞이하여 마루로 올라가 말하기를,

노스님의 후한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제 딸로서 섬기게 하고 싶습니다.” 하였다. 이에 스님이 성내며 말하기를, “이 무슨 말씀입니까.”하고 옷깃을 떨치고 떠나왔다.

 

호장이 재물을 털어 장인을 모아 암자 아래에 두 개의 탑을 세우게 하였다. 그런데 석재를 실은 말이 동구에 이르러 거꾸러지고 나아가지를 못하자 소로 교체하였다. 그 소가 지나간 바위 위에 소의 발자국이 생겼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를 우적석(牛跡石)’이라 하였다. 절 이름을 희방(喜方)’이라 하였는데, 이는 그 기쁨을 기념한 것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것이 희방사 창건 설화다.

 

희방사 한 참 아래에 있는 수철리 동네는 유석이 절을 지을 재료를 나르기 위해 무쇠로 다리를 놓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은 무쇠달(무쇠다리) 마을이라고 하여 펜션이 들어서기도 했고, 죽령 옛길의 정치를 느낄 수 있도록 조성했다. 폐역으로 된 희방사역 남쪽 시냇가에 가면 무쇠다리의 모형을 복원해서 그 이야기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또한 풍기읍 성내리에 있는 119안전센터 앞에 가면 희방사를 창건하기 위해 짐을 싣고 가는 소가 시내를 건널 수 있도록 놓았다는 돌다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주 소박한 돌다리이다.

 

희방사에는 월인석보 1권과 2권의 판본, 그리고 주해본 훈민정음 등이 있었으나 6,25 전란 때에 절이 전소되면서 함께 사라졌다. 희방사 주차장에서부터 약 500여 미터를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중간쯤에는 시원한 물줄기가 내려오는 희방폭포를 볼 수가 있다. 희방사를 지나면 연화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이어지고, 비로봉을 거쳐 국망봉, 형제봉까지 갈 수 있는 소백산 종주코스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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