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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단상/기타

[스크랩] 고구려 유리왕과 중앙아시아.소그디아 왕국 온씨/ 연세대 지배선 명예교수

by 竹溪(죽계) 2013.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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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리왕 중앙아시아에 파병 고선지보다 700년 앞서

 

연세대 지배선 명예교수 논문 발표

 

 

▲ 키르기스스탄과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접경지대 ‘나른’의 한 유적. 차사국(車師國) 본영이 있던 곳이다. photo 지배선

 

 

기원후 1세기경 고구려 유리왕의 군대가 중앙아시아 차사국(車師國·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인근)에 진출했으며 병사들은 결국 귀환하지 못한 채 그 지역에 정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지배선 연세대 명예교수(65·사학)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책부원구(冊府元龜), 자치통감(資治通鑑) 사료를 통해 이같은 사실(史實)을 파악했다”고 주장했다. 지 교수의 주장이 담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민사’ 논문은 1월 말 발간되는 ‘한민족 연구(韓民族 硏究) 12집’에 게재될 예정이다. 고구려계로는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 유민 출신인 당(唐)의 장수 고선지(高仙芝· ?~755)가 당의 병력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를 원정한 바 있다.

 

“중국 신나라가 파병 요청”

 

지 교수가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우선 제시한 것은 “중국 신(新)나라가 AD 12년(유리왕 31년) 고구려에 파병을 요청했다”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31년조의 기록이다. 신(新)은 유방이 세운 전한과 후한 사이인 기원후 9~23년에 있었던, 왕망이 세운 나라다. 고구려본기 제1, 135쪽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와 있다.

 

“유리왕(琉璃明王) 31년 신(新)의 왕망(王莽)이 흉노(차사국·車師國)를 정벌하려 고구려 병사를 징발했다. 그러나 징발된 고구려 군사가 흉노를 공격하러 가려 하지 않았다. 왕망은 강제로 고구려 군사를 보내려 했다. 그러자 고구려 군사들이 반발해 도리어 신(新)의 군현(郡縣)을 침략하고 도망쳤다.

왕망은 요서(遼西) 대윤(大尹·관직 이름) 전담(田譚)을 시켜 고구려 병사들을 추격하게 했다. 그러나 전담은 추격 중에 사망했다. 신(新)의 군현(州郡)에서는 그 허물을 고구려에 돌렸으나 엄우(嚴尤·왕망의 군사참모)가 왕망에게 아뢰길 ‘고구려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이를 위로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지금 너무 큰 벌을 내리면 (고구려가) 끝내 배반할까 두렵다’고 했다. 엄우는 왕망에게 ‘부여(扶餘)의 족속 중에서도 반드시 이에 동조하고 나서는 자가 있을 것’이라며 ‘흉노를 극복하지 못한 이때, 부여(扶餘)와 예맥(濊貊)이 또다시 들고일어난다면 이는 큰 우환거리가 된다’고 아뢰었다. 그런데도 왕망은 이를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령하여 고구려 군사를 치게 했다. 그 결과 엄우는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해 살해한 뒤 목을 베어 이를 전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며 유리왕 31년에 고구려 임금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 칭하고 이를 천하에 포고해 모두 알게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新)의 변방을 침구함이 더욱 심하였다.”

 

지 교수는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라고 말했다. 하나는 신(新)이 자력으로 흉노(차사·車師)를 제압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흉노 정벌 계획을 세울 때 강력한 고구려의 군사력을 빌렸다는 점은 신(新)이 독자적으로 흉노를 제압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지 교수는 “기마민족 흉노는 너무나 강력했기에 고구려가 파병한 군사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고 때문에 파병군이 작전을 포기했음을 알 수 있다”며 “이는 유리왕의 명령을 어긴 것이 되기 때문에 파병된 군사들이 다시 귀환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다른 한 가지는 파병된 고구려 병사들의 이후 행적이다. 지 교수는 “고구려군이 흉노를 공격하지 않자, 신(新)의 장수 전담(田譚)이 고구려 군사를 추격하다 전사했다는 사실(史實)은 전담의 군사보다 고구려 군사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했다.

 

유리왕의 파병 기록은 ‘고구려의 후예들이 중앙아시아에 정착했을 것’이란 가설로 이어진다. 지 교수는 “서역(西域) 차사국(車師國) 사람의 얼굴 모습이 고구려인과 같으며, 등까지 변발(辮髮)을 늘어뜨렸고, 여자 머리털은 땋아서 길게 늘어뜨렸다(其人面貌類高麗, 辮髮施之於背, 女子頭髮辮而垂)”는 통전(通典) 차사전(車師傳)조 5204쪽의 기록에 주목했다. 그는 “차사국 사람들의 얼굴 모습만 고구려인과 같다는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인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본다”면서도 “단지 고구려인과 유사하다는 뜻으로 쓴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이 기록에 대해 “고구려인의 얼굴 모습과 아울러 머리 모양까지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며 “당시 고구려 병사들이 삼국 최초의 집단 유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왕망의 부하, 엄우가 유인하여 죽인 인물이 구려후추(句麗侯騶)였다”고 적은 후한서(後漢書) 고구려전(高句驪傳)의 기록에 주목했다. 이는 왕망이 ‘후(候)’로 칭한 고구려의 인물(句麗侯)이 유리왕이 아니라 추(騶)라는 사람이란 의미로 “왕망이 고구려 임금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 칭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다른 것이다. ‘하구려’는 고구려를 얕잡아 낮춰 쓴 표현이다. 여기서 ‘신나라 왕망이 제후(侯)로 칭한 고구려후추(高句驪侯騶)가 누구냐’ 하는 문제가 부각된다.

 

고구려의 제후 ‘추’는 누구인가

 

지 교수는 “한서(漢書) 권(卷) 96, 왕망전(王莽傳)에 명확히 나와 있다”고 했다. 한서와 후한서 모두에 고구려후추(高句驪侯騶)가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라고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지 교수는 “연비는 왕망의 부하 엄우에게 유인돼 살해된 뒤 목이 잘린 고구려 장수다. 이 기록은 연비가 고구려 유리왕 휘하에서도 후작(侯爵·제후에 버금가는 자리)의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史實)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자 중 일부는 ‘고구려후추’를 유리왕으로 보고 있다”며 “그러나 고구려후추가 유리왕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그는 “이 인물은 고구려 유리왕 휘하에서 후작의 지위를 얻은 인물”이라며 “고구려후추를 유리왕과 동일한 인물로 보는 것은 중국인들의 역사관과 궤를 같이하는 해석”이라고 주장했다.

 

삼국사기는 유리왕본기 31년조에서 “왕망이 기뻐하며 고구려 임금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 칭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같은 책 유리왕본기 37년조 136쪽에는 “고구려 유리왕은 구려후추(句麗侯騶)가 엄우(嚴尤)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7년이 경과하여 죽었다”고 돼 있다. 지 교수는 “유학자인 김부식이 12세기에 삼국사기를 쓰면서 고구려와 관련된 부분을 애매모호하게 신화(神話)처럼 기술해 혼란이 벌어진 것”이라며 “유리왕과 고구려후추는 동일인이라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 조선

 

 

 

 

“온달과 온군해는 중앙아시아에서 왔다”

 

연대 지배선 명예교수, 카자흐스탄 학술회의서 주장

“옛 소그디아 왕국 온씨, 온달·온군해와 혈연관계”

고구려·통일신라와 교류 … 경주 괘릉 등에 흔적 남아

 

 

 

 

고구려의 ‘바보 장군’ 온달(溫達)과 신라 김춘추의 호위 무사 온군해(溫君解)가 중앙아시아 옛 소그디아 왕국의 왕족과 혈연관계라는 주장이 나왔다.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지배선 명예 교수는 1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고려대 러시아 CIS연구소·유라시아국립대 공동 주최로 열린 한-중앙아 국제학술회의서 이 같은 내용의 ‘한반도 역사에 나타난 소그디아인 온씨 2명’학설을 발표했다. 그는 지난해 백산학회지에 ‘온달의 중앙아 출신’설을 제기한 데 이어 올해 온군해를 추가했다.

지 교수는 “온달은 당시 강(康)국이라 불리던 소그디아의 왕족 출신이 고구려 여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삼국사기』 권 45 ‘온달전(溫達傳)’의 ‘온달의 얼굴이 멍청해 웃음거리가 됐다…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다녔다’는 기록은 “신분 질서가 엄한 고구려에서 오늘날 다문화 가정 출신 자녀가 겪은 것과 같은 어려움을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새로 찾아낸 『삼국유사』 ‘진덕왕본기(眞德王本紀) 2년 기사’를 인용, “김춘추를 호위하며 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입는 갓과 옷 차림’으로 위장, 고구려 병사의 칼을 대신 맞고 죽은 온군해도 소그디아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통일신라 8세기경 제작된 경주 괘릉의 무인석상.

연세대 지배선 교수는 “얼굴은 서역인이고 의상은 소그디아 스타일”이라고 말했다(왼쪽 긴 사진). [중앙포토]

흥덕왕릉 무인석상의 뒷모습. 오른쪽에 보이는 작은 뒷주머니는 ‘포체테’라 불리는 전형적인 소그디아 스타일이라고 지 교수는 말한다(오른쪽 가장 위).

행낭을 지고 여행하는 소그디아 사람의 인형. 7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국가박물관 소장(오른쪽 가운데).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역사학자들이 긴급 대담을 했다. 왼쪽부터 코지로바 카자흐스탄 유라시아 대학 교수, 지배선 연세대 명예교수, 알리세프 우즈베키스탄 고등교육부 산하역사연구소 위원, 미나라 키르키즈 한국대학 교수(오른쪽 가장 아래).

 

 

지 교수는 두 온씨가 소그디아 왕족이라는 근거로 중국 사서인 『전당문(全唐文)』 권999 ‘康國王烏勒伽傳(강국왕오륵가전)’, 『북사(北史)』 권 97 ‘강국전(康國傳)’, 구당서 권 198, 위서 관씨지에 있는 ‘소그디아는 강국(康國)이라 불렸으며 그 왕족은 온씨’라는 기록을 들었다. 지 교수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비롯해 고구려·신라·백제의 사서, 중국 사서에서 온씨는 오로지 소그디아에만 있다”고 설명했다.

소그디아인의 기질에 대해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이곳 왕들은 호탕하고 용맹하다. 대부분 용사다…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전투할 때 그들 앞에 나타날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신당서(新唐書)』 권 221 ‘강전(康傳)’에는 “남자 20세가 되면 이익을 도모할 수만 있으면 안가는 나라가 없었다”고 썼다. 요컨대 용맹했던 소그디아 왕족들이 국제적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 온달과 온군해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지 교수는 “고구려는 돌궐 과 관계가 깊었으며 돌궐의 지배 아래 있던 소그디아와의 교류도 활발했다”며 “ 현재 사마르칸트에 있는 소그디아 왕국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고구려 사신이 등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다. 아울러 “소그디아인은 통일 신라까지 진출했으며 그 증거가 경주 괘릉과 흥덕왕릉의 서역인 무인상”이라며 “지난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대 복식사 연구자가 무인상의 허리띠 위로 드리운 복장, 포체테라 불리는 작은 뒷주머니가 전형적인 소그디아 스타일임을 확인했다”고 했다.

학술회의에 참가한 우즈베키스탄의 알리세프 박사(역사학)는 “고대 무역사에 따르면 소그디아인의 활동 영역이 한반도까지 미쳤을 것”이라며 “고구려가 소그디아로 사람을 보냈으니 소그디아인이 고구려에서 결혼해 온달을 낳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카자흐스탄의 코지로바 바시에브나 박사(역사학)도 “고대무역 연구에 따르면 소그디아가 고구려로 보이는 나라와 거래한 기록들이 나온다”고 말했다.

 

◆소그디아(Sogdia)=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5~8세기에 융성했던 나라.

소그디아인들은 이란계로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무예에 능하고 이재에 밝아 흉노·돌궐·위구르 등 주변 유목국가를 넘나들며 다양하게 교역했다. 소그디아어는 중앙아시아 스텝지역을 지배했던 대 돌궐제국에서 공용문자로 쓰일 정도였다.

/ 중앙

 

 

 

 

[문화를 찾아서]

고구려인 고선지, 1300년 전 실크로드를 제패하다

 

한반도의 1.5배에 달하는 ‘돌아올 수 없는 사막’ 타클라마칸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파미르 고원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와칸 계곡

히말라야 힌두쿠시 산맥의 4703m 다르코트 정상…

이것이 바로 비단길이라 불리는 실크로드.

 

 

▲ 고선지가 제패한 실크로드 원정길(그래픽: 박선아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1300년 전 중앙아시아를 호령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한 고구려인이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중국에서는 ‘서역수호신’으로 아랍 사료에는 ‘중국 산맥의 왕’으로 묘사된 그 이름은 바로 ‘고선지’다.

당나라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저항을 막기 위해 고구려인들을 사막 깊숙이 보냈다. 이역에서 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 장수 고선지(高仙芝, ~756년)가 태어났다.

중국 고서 <구당서>에는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는 고구려가 멸망한 뒤 중원으로 이주해 하서군에 종사했으며 이후 서역의 4진(四鎭)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다’고 기록돼 있다.

고선지는 20세에 안서도호부 유격장군에 등용됐으며 안서절도사 부몽영찰의 신임을 얻어 언기진수사가 됐다.
고선지는 741년, 톈산산맥 서쪽의 달해부가 당에 반기를 들고 북상하자 2천의 기병을 이끌고 토벌에 나서 진압했다. 이 공으로 안서도호부의 부도호가 됐으며, 당의 서역 군사 요충지인 4진의 도지병마사에 올랐다.

그는 747년에 파미르 고원에 올라 중국을 위협하는 토벌을 격파했다. 높고 험준한 산맥인 파미르 고원과 빙하 바르코트 고개를 넘나드는 대원정에도 72개국을 단숨에 항복시켰다. 이로써 명실상부 실크로드의 제왕으로 등극했다.

서쪽 실크로드의 모든 나라는 고선지의 지배영역이었다. 749년 걸사국 정벌을 계기로 이슬람 제국과 맞서야 하는 상황에 이르는데 4년 뒤인 751년에 탈라스평원에서 일생일대 대전을 치룬다. 이것이 동서양 최초이자 고선지의 마지막 전쟁인 ‘탈라스 전쟁’이다.

고선지는 755년 안녹산의 난 때 장안을 수비하다 조정의 참소로 인해 진중에서 처형됐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그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긴 부하들의 원통한 외침이 천지를 진동했다고 전해진다.

<고선지 평전>을 쓴 연세대 사학과 지배선 교수는 “고선지는 한민족의 개척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박선혜 기자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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