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단상/기타

[스크랩] 중당(中唐) 및 만당(晩唐)

by 竹溪(죽계) 2011. 2. 2.
728x90
SMALL

★당시唐詩★

중국 당대(唐代:618~907)에 지어진 시의 총칭. 단 오대(五代)의 작품도 포함된다. 이 시기에 작가들의 폭도 다양해졌으며, 많은 시인들이 활약했다. 청대(淸代) 1707년(강희 46)에 편찬된 〈전당시 全唐詩〉에 2,300여 명의 시인과 4만 8,900여 수의 작품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가 가진 문학상의 의의를 논할 때 주목해야 할 점은 중국 고전시의 형식이 이 시대에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정형화되어 있는 당시의 운

율법칙은 후세 모든 시인들의 규범이 되었다.

당시의 발전단계는 초당(初唐)·성당(盛唐)·중당(中唐)·만당(晩唐)의 4시기로 구분된다.

 

◈초당(618~712)의 시인은 대부분 관리였으며 따라서 이 시기의 주류는 궁정시였다. 그리고 여러 시인들이 경쟁했기 때문에 서로의 시를 제약하는 갖가지 규칙이 정해져서 시의 정형화를 촉진했다. 초당4걸로 병칭되는 왕발(王勃)·노조린(盧照隣)·양형(楊炯)·낙빈왕(駱賓王)이 유명하다. 초당 후기에는 유미주의(唯美主義) 시풍을 계승하면서 궁정시인으로서 율시(律詩)의 완성을 적극 후원한 문장4우(文章四友)가 있었다. 이들은 최융(崔融)·이교(李嶠)·소미도(蘇味道)·두심언(杜審言)으로, 후에 심전기(沈佺期)·송지문(宋之問)이 근체시를 완성시키는 데 바탕을 마련했다.

 

◈성당(713~765)의 시인은 유명한 사람이 많지만 왕유(王維)· 이백(李白)· 두보(杜甫)가 가장 대표적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사상을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는데, 왕유는 불교, 이백은 도가, 두보는 유가의 신념을 지켰다. 그에 따라 이들 시의 품격도 달라졌다. 왕유는 '자연시'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오언(五言)이 중심이 되는 시를 썼으며 전원의 한적한 생활과 산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했다. 이백은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위대한 시인으로, 아름다운 산수시(山水詩)의 정취와 웅대한 악부시(樂府詩)의 풍격을 흡수했고 오언·칠언의 장편·단편에 모두 능했다. 두보는 성당 시대에 이백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또다른 위대한 시인이다. 그들은 흔히 '이·두'로 불리지만, 이백의 성격이 격정적이고 자유분방한 데 비하여 두보는 유가적인 윤리관을 바탕으로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중당(766~835)의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한유(韓愈)와 백거이(白居易)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율시도 잘 지었으나 고체시(古體詩)에 특히 뛰어났다. 한유의 고시는 흔히 '험난하고 괴이하다'고 형용되어지며 백거이의 시는 평이하고 명쾌하다. 또한 이들은 안사(安史)의 난 직후의 혼란했던 사회상을 작품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백거이는 신악부(新樂府) 운동을 통해 사회의 모순을 고발했으며, 한유는 고문운동(古文運動)에서 문장의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했다.

 

◈만당(836~907)에서는 경쾌한 필치로 시를 지었던 두목(杜牧)과, 연애를 주제로 상징수법을 사용했고 칠언고시에 뛰어났던 이상은(李商隱)이 걸출하다. 이상은은 중국 시인 가운데 가장 난해한 시를 쓴 작가로 중국시의 창작기교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당시선집으로는 송대 주필(周弼)의 〈삼체시 三體詩〉와 명대 이반룡(李攀龍)이 지었다고 하는 〈당시선 唐詩選〉이 있다. 전자는 중당·만당의 금체시(今體詩)만을 수록하여 섬세하고 아름다운 당시의 특징을 강조했고, 후자는 주로 초당·성당의 시를 수록하고 고체시도 실었지만 선택이 조금 치우친 감이 있다.

 

 

 

 

★중당★

당시(唐詩)의 4시기 구분에서 성당(盛唐)과 만당(晩唐) 중간에 낀 시기. 대력연간(大曆年間:766∼779)부터 태화연간(太和年間:827~835)에 이르는 약 70년간이다. 성당 말기의 안사(安史)의 난 이후, 종래의 귀족문화는 기울었으나 새로운 사대부층의 합리성을 존중하고 조화를 중시하는 심정을 배경으로 하여 신선한 걸작들이 나왔다. 초기에는 위응물(韋應物) ·유장경(劉長卿) 및 대력십재사(大曆十才士) 등이 이름을 날렸으며 이윽고 원화(元和)연간에 이르자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원진(元拂) ·백거이(白居易:樂天) 등 거장을 배출하여 고시(古詩)가 번창하였다.

 

☆ 한유

자 퇴지(退之). 시호 문공(文公).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河南省) 출생. 792년 진사에 등과, 지방 절도사의 속관을 거쳐 803년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을 때, 수도(首都)의 장관을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양산현(陽山縣:廣東省)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소환된 후로는 주로 국자감(國子監)에서 근무하였으며, 817년 오원제(吳元濟)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워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으나, 819년 헌종황제(憲宗皇帝)가 불골(佛骨)을 모신 것을 간하다가 조주(潮州:廣東省) 자사(刺史)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헌종 사후에 소환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올랐다. 문학상의 공적은 첫째, 산문의 문체개혁(文體改革)을 들 수 있다. 종래의 대구(對句)를 중심으로 짓는 병문(騈文)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형의 고문(古文)을 친구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창도하였다. 고문은 송대 이후 중국 산문문체의 표준이 되었으며, 그의 문장은 그 모범으로 알려졌다.

둘째, 시에 있어 지적인 흥미를 정련(精練)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 그 결과 때로는 난해하고 산문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대의 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 ·불교를 배격하였으며, 송대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작품은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40권) 《외집(外集)》(10권) 《유문(遺文)》(1권) 등의 문집에 수록되었다.

 

☆유종원

자 자후(子厚). 장안(長安) 출생. 유하동(柳河東)·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른다. 관직에 있을 때 한유(韓愈)·유우석(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었다. 혁신적 진보분자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획하였으나 실패하여 변경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좌절과 13년간에 걸친 변경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한유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적이었다. 한유가 전통주의인 데 반하여, 유종원은 유·도·불(儒道佛)을 참작하고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천설(天說)》《비국어(非國語)》《봉건론(封建論)》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 우언(寓言) 형식을 취한 풍자문(諷刺文)과 산수(山水)를 묘사한 산문에도 능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하였는데, 그 자구(字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 ·정채함은 특히 뛰어났다. 시는 산수의 시를 특히 잘하여 도연명(陶淵明)과 비교되었고,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등과 당시(唐詩)의 자연파를 형성하였다. 송별시 ·우언시(寓言詩)에도 뛰어나 우분애원(憂憤哀怨)의 정을 표현하는 수법은 굴원(屈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저서에 시문집 《유하동집(柳河東集)》(45권) 《외집(外集)》(2권) 《보유(補遺)》(1권) 등이 있다.

 

 

☆안사의 난 (安史-亂)

중국 당(唐)나라 중기에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 등이 일으킨 반란(755~763).

【난의 원인 및 배경】

당왕조(618~907)는 현종(玄宗:재위 712~756) 때 국력이 절정에 달하였고 전통문화도 집대성되어 외형적으로는 화려하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초기의 지배체제를 지탱해온 율령제(律令制)의 변질, 균전제(均田制) 및 조용조(租庸調) 세제의 이완(弛緩), 부병제(府兵制)의 붕괴 등으로 왕조의 기반이었던 자립 소농민층이 와해되기 시작하여, 이들은 토지를 상실하고 유민화하였다. 당왕조는 토지와 유리된 도호(逃戶)를 조사하고, 전지(田地)와 재산에 대한 과세(課稅), 모병(募兵)의 조직화 등을 통하여 지배체제의 존속을 꾀하려 하였으나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억압되었던 귀족들이 현종대에 들어와 세력을 잡았고, 관료층 중에서도 구래(舊來)의 문벌귀족들은 농업생산력의 발전, 대토지 소유제의 전개, 상업자본의 이용 등으로 새로 진출한 교양인이나 지주 ·상인층 출신의 능리(能吏)와 대결하여 정치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세력을 잡은 문벌 ·귀족 출신의 재상 이임보(李林甫) 등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여념이 없었고, 세력 유지를 위해 변방 절도사로 이민족이나 평민 등도 등용시켰다. 특히 징병제가 파탄된 후, 절도사들은 대량의 용병을 지휘하는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였는데, 안녹산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현종 ·이임보 ·양귀비 등에게 신임을 받아 유주(幽州) ·평로(平盧) ·하동(河東)의 절도사를 겸임할 정도로 세력이 막강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을 때, 이임보가 사망하자 중년을 넘기면서 정무(政務)에 지쳐 양귀비(楊貴妃)와의 애욕생활로 나날을 보내던 현종 밑에서 재정을 장악한 양귀비의 일족인 재상 양국충(楊國忠)은 동북 국경 방비를 맡아 대병을 장악한 번장(蕃將) 안녹산과 대결하는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난의 경과】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녹산이 모반하려 하므로 소환하도록 요구하였다. 755년(天寶 14) 11월, 안녹산은 거란(契丹) ·철륵(鐵勒)등 이민족의 정예(精銳) 8,000여 기(騎)를 중심으로 한병(漢兵) ·번병(蕃兵)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간신 양국충 토벌을 구실로 범양(范陽:北京)에서 거병하여 동도(東都) 뤄양[洛陽]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태평에 젖은 당나라 군 ·관(軍官)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전하여 다음달 뤄양이 안녹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에 당나라는 서북변 방위군을 동으로 이동시켜 퉁관[潼關]으로 보내자 반군(叛軍)은 당나라 20만 대군과 대결하게 되었다. 허베이[河北]에서는 토착지주와 협력하여 의병을 일으킨 평원태수(平原太守) 안진경(顔眞卿), 상산태수(常山太守) 안고경(顔뫘卿) 등이 반군의 퇴로를 차단하였고, 당장(唐將) 곽자의(郭子儀) ·이광필(李光弼) 등은 안녹산의 부장(部將) 사사명을 격퇴하였다.

한편 허난[河南]에서도 수양성(彧陽城)을 사수한 허원(許遠)과 장순(張巡) 등이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듬해 6월, 양국충은 퉁관 결전을 명령하였는데 작전 미숙으로 가서한(哥舒翰)이 이끈 방위군이 대패하여 퉁관이 함락되고, 반군은 수도 장안[長安]으로 쇄도하였다. 이에 현종은 서쪽으로 피신하였는데, 기아에 지친 병사들의 압력으로 산시성[陝西省] 마외역(馬嵬驛)에서 양국충은 살해되고, 양귀비는 액사(縊死)하였다. 당시 귀족들은 일족의 안일만을 도모하였으므로 민중들은 스스로 자위집단을 형성하였다. 민중은 지방관 안진경 등을 지지하였고, 장안 부근에서 유격전을 폈다. 당시 서북쪽으로 피신한 황태자 형(亨)은 두홍점(杜鴻漸) 등에게 추대되어 756년 간쑤성[甘肅省]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는데 그가 곧 숙종(肅宗:재위756~762)이다.

한편 안녹산은 실명과 등창으로 건강이 악화된 데다 횡포해져 757년(至德 2) l월, 아들 경서(慶緖)에게 암살되고, 경서는 범양의 본거지를 사사명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숙종은 태자 광평왕(廣平王:훗날의 代宗)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곽자의를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여 삭방군(朔方軍)과 위구르[回紇] 원군의 도움으로 장안과 뤄양 탈환에 성공하였다. 그 후 일시 굴복한 사사명이 758년(肅宗 乾元 1) 다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제위에 올라, 토벌군을 상주(相州)에서 대파한 안경서를 죽이고 뤄양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761년(上元 2) 2월, 사사명도 그 아들 조의(朝義)에게 살해되어 반란군은 그의 지휘하에 들어갔으나, 조의는 당나라를 도운 위구르군의 공격과 범양절도사 이회선(李懷仙)에 의하여 763년(廣德 1) l월 타도되고 9년 여에 걸친 대란은 종결되었다.

 

【난의 영향】

이민족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과, 위구르 원군에 의하여 뤄양, 장안 양경(兩京)은 황폐되고 영화를 자랑하던 도시 건축물과 문화재는 대부분 회신(灰燼)되어 구문화의 전통과, 문화 담당자였던 귀족들은 괴멸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난의 평정을 위해 지방에 파견된 절도사가 병권을 장악하자 종래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는 무너져 군사적 지방분권화 현상이 강화되고, 특히 화북지방은 오랫동안 반독립적 상태가 지속되었다. 군비조달을 위해 백성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염전매(鹽專賣)의 급증으로 당왕조 전기의 체제가 붕괴되어 균전제하의 조용조 세법은 양세법(兩稅法)으로 전환되었다. 중앙집권체제의 약화로 귀족세력은 타격을 받고 토호(土豪)와 상인들이 번진(藩鎭) 무력세력과 결합하여 정치 ·경제적 성장을 달성하게 되자 중국 고대의 율령 지배 체제와 이에 수반되는 문화는 근본적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당★

중국 당시(唐詩)의 4시기(時期) 구분 중 마지막 시대.

문종 개성연간(文宗開成年間:836∼840)에서 당나라 후기에 이르는 약 70년간을 말한다. 약 70년간의 중당시대(中唐時代)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심각해진 시기로서 특히 환관(宦官)의 횡포가 심하여 그 결과 천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지방에서는 번진(藩鎭)의 세력이 커지는 등 조정은 붕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문화면에 있어서도 볼 만한 것은 거의 없고 문학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겨우 두목(杜牧) ·이상은(李商隱) ·온정균(溫庭筠) 등의 작가가 나왔는데 이들의 특징은 근체시(近體詩)의 기교와 섬세함을 본체로 하고 찰나적인 감각을 표현함으로써 자기만족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두목 [杜牧 803~853]

자 목지(牧之), 호 번천(樊川). 경조부 만년현(京兆府 萬年縣:陝西省 西安市) 출생.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불리며, 또 작품이 두보(杜甫)와 비슷하다 하여 소두(小杜)로 불린다. 26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굉문관교서랑(宏文館校書郞)이 되고, 황주(黃州) ·지주(池州) ·목주(睦州) 등의 자사(刺史:지방장관)를 역임한 후, 벼슬이 중서사인(中書舍人)까지 올랐다. 매사에 구애받지 않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당나라의 쇠운을 만회하려고 무한히 노력하였다. 정치와 병법을 연구하고, 《아방궁(阿房宮)의 부(賦)》라는 시를 지어 경종왕을 충고하려고 애썼다. 산문에도 뛰어났지만 시에 더 뛰어났으며, 근체시(近體詩) 특히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잘 했다. 만당시대의 시인에 어울리게 말의 수식에 능했으나, 내용을 보다 중시하였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소재를 빌어 세속을 풍자한 영사적(詠史的) 작품이 나오고 함축성이 풍부한 서정시가 나왔다. 대표작으로 시 《아방궁의 부》 이외에 《강남춘(江南春)》 《번천문집(樊川文集)》(20권) 등이 있다.

 

☆이상은 [李商隱 812~858]

자 의산(義山). 호 옥계생(玉谿生). 허난성[河南省] 친양[沁陽] 출생. 처음 우당(牛黨)의 영호초(令狐楚)에게서 변려문(폿儷文)을 배우고 그의 막료가 되었으나, 후에 반대당인이당(李黨)의 왕무원(王茂元)의 서기가 되어 그의 딸을 아내로 맞았기 때문에 불우한 생애를 보냈다. 그의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 경향은 이 소외감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그는 변려문의 명수이긴 하였으나 그의 시는 한(漢) ·위(魏) ·6조시(六朝詩)의 정수를 계승하였고, 당시에서는 두보(杜甫)를 배웠으며, 이하(李賀)의 상징적 기법을 사랑하였다. 또한 전고(典故)를 자주 인용, 풍려(豊麗)한 자구를 구사하여 당대 수사주의문학(修辭主義文學)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작품에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시킨 서사시, 또는 위정자를 풍자하는 영사시(井史詩) 등이 있으나, 애정을 주제로 한 《무제(無題)》에서 그의 창작력은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이의산시집(李義山詩集)》 《번남문집(樊南文集)》이 있으며, 《이의산잡찬(李義山雜纂)》도 그의 저작으로 전한다.

 

☆온정균 [溫庭筠 812?~870]

자 비경(飛卿). 본명 기(岐). 병주(幷州:山西省 太原) 출생. 문재(文才)가 뛰어나 과거시험장에서 8번 팔짱을 끼니 8운시(八韻詩)가 완성되었다 하여 온팔차(溫八叉)라 불렸으나, 소행이 나빴기 때문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벼슬은 현위(縣尉) ·절도사부관 ·국자조교(國子助敎) 등에 그쳤고, 경력이 별로 분명하지 않다. 거오방탕(倨傲放蕩)하여 반(反)권력적인 행동이 많았으므로, 당시의 재상에게 미움을 받아 영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염시(艶詩)를 많이 지었으며, 당시의 이상은(李商隱)과 함께 ‘온이(溫李)’라고 병칭되었다. 사(詞)의 작가로도 유명하고, 특히 악부(樂府)에 뛰어나 화려한 표현으로 스러져가는 6조 문화에 대한 동경과 석춘(惜春)의 정 등을 노래하였다. 당나라 해체시기의 시정을 가장 잘 대표하는, 따뜻하고 색채가 넘치는 관능적 세계를 만들어냈다. 또 유행가요였던 ‘사(詞)’를 서정시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데에도 많은 공적을 남겼다. 저서로 《온비경시집》(7권) 《건손자》 《채다록(採茶錄)》이 있다.

 

☆ 근체시

금체시(今體詩)라고도 한다. 음절의 억양에 따른 배열법이나 대구(對句) 등 구성법에 일정한 규칙이 있는 시체이다.

오언(五言:1구가 5자)과 칠언(七言:1구가 7자)의 절구(絶句)와 율시(律詩)의 2종이 있다. 당(唐)나라 때 근체시가 확립되었고 제(齊) ·양(梁)나라 때에 일어난 ‘사성(四聲) ·팔병설(八病說)’로 대표되는 중국어 음운의 특징에 대한 자각이 근체시의 성립을 촉구하였다. 종래에는 다만 무의식적으로 청각의 아름다움에 호소할 뿐이었던 것이, 일정한 규칙을 지향하게 되었다.

절구는 사구(四句)로 되어 있다. 오언사구의 체는 육조(六朝)의 민가(民歌)에서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비속(卑俗)한 편이었으나 육조 말(3∼6세기)에는 내용과 체제가 정비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칠언은 오언의 체가 정리된 뒤에 일어나 초당(初唐:7세기) 말경에 자리를 잡는다. 절구는 단시형(短詩形)이기 때문에 찰나적 감정을 응축시키는 데 적절하며 군더더기가 없는 표현으로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율시는 팔구(八句)인데, 2구를 1연으로 하고 4연으로 되어 있다. 중간 2연은 대구(對句)를 쓰는 규칙이다. 평측(平仄)의 배열법은 절구와 같다. 이미 제 ·양시대부터 팔구의 오언시는 자주 만들어졌고 초당 때 율시로서 자리를 굳혔다. 칠언은 발생이 늦었고 또 오언에 비해 격이 떨어지는 비속한 가락이 좀체로 가시지 않았는데, 초당 말기에 시인의 본격적인 작품이 나타나 급격하게 발달하였다. 오언과 칠언이 다같이 응수(應酬)의 시로서 발달하였는데, 여기에 내면적인 깊이를 가하여 일층 고급문학으로 완성시킨 사람은 두보(杜甫)였다. 율시는 절구와 같이 찰나적 감정을 응집적으로 노래하나 중간의 대구의 묘미, 치밀한 구성미 등으로 보다 복잡한 맛을 지닌다.

율시와 같은 시체에 배율(排律)이라는 것이 있다. 율시의 중간 대구의 부분이 늘어난 것인데, 장률(長律)이라고도 한다. 의례적 응수에 맞는 중후한 시체이다. 오언이 정격(正格)이며, 칠언은 수도 적고 통상 시체의 분류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출처 : 도도하(滔滔河)
글쓴이 : 도도하 원글보기
메모 :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