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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의세계/황진이

황진이와 벽계수

by 竹溪(죽계) 2006.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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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진이와 벽계수 이야기


  황진이는 송도의 이름난 기생으로 아름다움과 기예가 함께 뛰어나서 그 명성이 온 나라에 가득했다. 왕족 중에 벽계수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황진이를 한번 만나 보려 했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손곡 이달에게 계책을 물었다.

 

  이달이 말하기를, “황진이는 천하의 풍류객이 아니면 그 마음을 사기 어려운데, 공은 내 말을 따라 그 뜻을 이루겠는가?” 하니 벽계수는 말하기를, “내 마땅히 그대의 말을 따르지 ”라고 했다.

 

  손곡(이달)이 말하기를, “공은 본래 거문고를 잘 타니 동자로 하여금 거문고를 가지고 따르게 하고, 공이 당나귀를 타고 황진이의 집 옆의 누각에 올라 술을 마신 후 거문고 한곡을 탈 것같으면 황진이는 반드시 마음이 움직여 그대를 보러 올 것이니, 그대는 보아도 못본 체하고 일어나서 곧 당나귀를 타고 돌아가도록 하시게. 그리하면 황진이가 반드시 그대를 뒤쫓을 것일세. 만약 그대가 취적교를 지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그대는 뜻을 이루게 될 것일세. 그렇지 못할 경우엔 그 뜻을 이루지 못하리라” 했다.

 

  벽계수는 그의 말에 따라 당나귀를 타고 동자로 하여금 거문고를 가지고 따르게 한 다음, 황진이의 집을 지나 누각에 올랐다. 그가 술을 마시고 거문고 한 곡을 탄 후 곧 당나귀에 올라 떠나가니, 과연 황진이가 뒤따라 와서 거문고를 든 동자에게 물어 그가 벽계수라 하는 사람임을 알고는 곧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기를,


  “청산리 벽계수야 쉬지 않고 감을 자랑마라.

   한 번 큰 바다에 이르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어찌 잠깐 쉬어 가지 않을 소냐.

   명월이 공산에 가득하니 놀다 가면 어떠하리"

 

하자, 벽계수가 이 노래를 듣고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취적교에 이르러 뒤를 돌아 보다가 그만 당나귀에서 떨어지니, 황진이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벽계수는 멋진 선비가 아니라 풍류객에 불과하구나” 하고 곧 돌아가 버렸다. 벽계수는 부끄러워 스스로를 한탄해 마지 않았다.

 

이런 벽계수와의 일화에 대해 19세기에 활동한 조선 후기의 시인 홍양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靑山裏碧溪水。誰令日夜奔流。一到滄海無歸日。明月滿山。何不少淹留。

 

푸른 산 속에 흐르는 맑은 물 벽계수야

누가 그렇게 밤 낮으로 바쁘게 흐르라고 시키더냐

푸른 바다에 한 번 이르면 돌아올 수 없도다

밝은 달이 온 산에 가득하니

어찌 잠시라도 폭포에 머무르지 않느냐

 

 

 

홍양호(洪良浩) 

        

 1724(경종 4)∼1802(순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만회(萬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중성(重聖)이고, 아버지는 진보(鎭輔)이며, 어머니는 심수현(沈壽賢)의 딸이다. 이조판서 경모(敬謨)의 할아버지이다.

 

    1747년(영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774년 등준시(登俊試)에 뽑히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1)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경흥부사로 밀려났다가 홍국영이 실각되면서 1781년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이어 사간원대사간·사헌부대사헌·평안도관찰사·이조판서 등을 거쳐 1799년에는 홍문관·예문관 양관(兩館)의 대제학을 겸임하는 최고의 영예를 지냈다. 두 차례에 걸쳐 연경(燕京)을 다녀오면서 중국의 석학들과 교유해 문명(文名)을 날렸으며, 고증학(考證學)을 수용·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영조실록≫·≪국조보감≫·≪갱장록 羹墻錄≫·≪동문휘고 同文彙考≫를 비롯한 각종 편찬사업을 주관하기도 했으며, 지방관의 지침서인 ≪목민대방 牧民大方≫을 저술하였다. 특히, 1764년에는 일본에 가는 통신사(通信使) 일행에게 부탁해 벚나무 묘목을 들여다가 서울 우이동에 심어 뒷날의 경승지를 이루게도 하였다. 1801년 판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이듬 해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이계집≫ 37권 외에 ≪육서경위 六書經緯≫·≪군서발배 群書發排≫·≪격물해 格物解≫·≪칠정변 七情辨≫·≪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고려대사기 高麗大事記≫·≪흥왕조승 興王肇乘≫·≪삭방습유 朔方拾遺≫·≪북새기략 北塞記略≫·≪만물원시 萬物原始≫·≪향약절중 鄕約折中≫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문장이 바르면서 숙련되고 법칙이 있어서 당시 조정의 신료 중에 따를 사람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글씨도 진체(晉體)와 당체(唐體)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곡산의 신덕왕후사제구기비(神德王后私第舊基碑)와 수원성(水原城)의 북문루상량문(北門樓上梁文)이 대표적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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