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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육신관련/사육신기록

사육신 신증동국여지승람 노은서원기록

by 竹溪(죽계) 2006.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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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忠淸道)

홍주목(洪州牧)


동쪽으로는 대흥현(大興縣) 경계까지 25리이고, 남쪽으로는 보령현(保寧縣) 경계까지 29리이고, 서쪽으로는 결성현(結城縣) 경계까지 9리이고, 북쪽으로는 덕산현(德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운주(運州)로 성종(成宗) 14년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고, 현종(顯宗) 3년에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공민왕(恭愍王) 7년에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고향이라 하여 목(牧)으로 승격시켰다가 17년에 지주사로 강등되고, 20년에 다시 목으로 하였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인습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속현】 신평현 (新平縣) 주 북쪽 90리에 있으며, 면천군(沔川郡) 동쪽 마을까지 넘어 들어가 있다. 본래 백제의 사평현(沙平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혜성군(槥城郡)의 속현으로 삼았던 것을 현종 9년에 본주로 붙였다.

【진관】 군(郡) 5 서천(舒川)ㆍ서산(瑞山)ㆍ태안(泰安)ㆍ면천(沔川)ㆍ온양(溫陽). 현(縣) 14 평택(平澤)ㆍ홍산(鴻山)ㆍ덕산(德山)ㆍ청양(靑陽)ㆍ대흥(大興)ㆍ비인(庇仁)ㆍ남포(藍浦)ㆍ결성(結城)ㆍ보령(保寧)ㆍ아산(牙山)ㆍ신창(新昌)ㆍ예산(禮山)ㆍ해미(海美)ㆍ당진(唐津).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운주(運州)ㆍ안평(安平)ㆍ해풍(海豐)ㆍ해흥(海興)ㆍ홍양(洪陽).

【성씨】본주 홍(洪)ㆍ이(李)ㆍ한(韓)ㆍ송(宋)ㆍ백(白)ㆍ조(趙)가 있으며, 윤(尹)ㆍ보(甫)ㆍ노(盧) 모두 이성(吏姓)이다. 장(張)ㆍ최(崔)ㆍ만(萬) 모두 촌성(村姓)이다.신평 이(李)ㆍ송(宋)ㆍ방(方)ㆍ호(扈). 흥양(興陽) 표(表)ㆍ조(趙)ㆍ최(崔)ㆍ이(李)ㆍ나(羅)ㆍ김(金). 고구(高丘) 이(李)ㆍ전(全)ㆍ임(任)ㆍ신(申)ㆍ노(盧). 여양(驪陽) 박(朴)ㆍ손(孫)ㆍ나(羅)ㆍ곽(郭)이 있으며, 진(陳) 촌성(村姓)이다. 이(李) 홍주(洪州). 오(吳) 해주(海州). 강(康)ㆍ송(宋) 모두 서울 사람. 박(朴) 삭주(朔州).합덕(合德) 문(文)ㆍ김(金)이 있으며, 이(李) 속성(續姓)이다.용화(用和) 최(崔). 정성(政聲) 최(崔)ㆍ이(李)ㆍ백(白). 운천(雲川) 김(金)ㆍ이(李). 태산(太山) 백(白). 용천(龍泉) 배(裵) 궁경(躬耕)과 같다.

【산천】 월산(月山) 주 서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사성산(巳城山) 주 동쪽 4리에 있다. 삼존산(三尊山) 주 서쪽 17리에 있다. 팔봉산(八峯山) 주 북쪽 8리에 있으니, 곧 덕산현(德山縣)이다. 봉수산(鳳首山) 주 동쪽 21리인 대흥현(大興縣) 경계에 있다. 오서산(烏栖山) 일명 오성산(烏聖山)이라고도 한다. 주 남쪽 18리에 있으며, 또 보령(保寧)ㆍ결성(結城) 두 고을 산천 조에도 나와 있다. 오리현(吾里峴) 주 남쪽 47리인 청양현(靑陽縣) 경계에 있다. 바다 신평(新平)ㆍ고구(高丘)ㆍ흥양(興陽)은 모두 바다와 접하고 있다. 금마천(金馬川) 주 동쪽 5리에 있으니, 오서산에서 발원하여 덕산현 신교천(新橋川)으로 들어간다. 여양천(驪陽川) 여양현(驪陽縣) 남쪽에 있다. 오서산에서 발원하며, 신창현(新昌縣) 정포도(井浦渡)로 들어간다. 원산도(元山島) 주위는 47리이며, 목장(牧場)이 있다. 동을비도(冬乙非島) 원산도 곁에 있으며, 주위는 1백 13리이다. 잉분도(芿盆島) 주위가 95리이다. 사읍시도(沙邑時島) 주위가 59리이다. 흥아음도(興兒音島) 주위가 73리이다. 고태도(古台島) 주위가 29리이다. ○ 이상의 섬들은 모두 본주 남해(南海) 가운데에 있다. 흥양곶(興陽串) 즉 옛 흥양현(興陽縣)이니, 주위는 49리이며, 목장이 있다. 대산곶(大山串) 대산부곡(大山部曲)에 있다. 서산군(瑞山郡) 경계와 연해 있으며, 주위는 90리이고, 목장이 있다. 대진(大津) 신평현(新平縣) 북쪽 1백 14리에 있다.『신증』 원당산(元堂山) 주 북쪽 40리에 있다. 삼봉산(三峯山) 주 동쪽 23리에 있는데, 그 가운데 봉우리에 최영(崔瑩)의 사당(祠堂)이 있다. 장고도(杖鼓島) 고태도(古台島)와 대치(對峙)하고 있는데, 주위는 10리이다. 사아음도(沙兒音島) 주위가 25리이다. 외야대도(外也代島) 주위가 30리이며, 죽전(竹箭)이 난다. 어을초대도(於乙草代島) 주위는 25리이며, 죽전이 난다. 횡건도(橫巾島) 주위는 13리이다. 이상의 섬들도 모두 본주 남해 가운데에 있다.

【토산】 청어(靑魚)ㆍ넙치[廣魚]ㆍ상어[鯊魚]ㆍ홍어(洪魚)ㆍ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낙지[絡締]ㆍ조개[蛤]ㆍ굴[石花]ㆍ토화(土花)ㆍ대하(大蝦)ㆍ중하(中蝦)ㆍ자하(紫蝦)ㆍ황소어(黃小魚)ㆍ전어(錢魚)ㆍ삼치[麻魚]ㆍ살조개[江瑤柱]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김[海衣]ㆍ황각(黃角)ㆍ청각(靑角)ㆍ대나무[竹]ㆍ왕골[莞草], 철(鐵) 생천포(生天浦)에서 난다. 뱅어[白魚]ㆍ준치[眞魚]ㆍ밴댕이[蘇魚]ㆍ농어[鱸魚]ㆍ게[蟹]. 『신증』 죽전(竹箭).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4천 9백 15척에 높이 15척이며, 그 안에 세 개의 샘이 있다.

【봉수】 흥양곶 봉수(興陽串烽燧) 동쪽으로 보령현(保寧縣) 조침산(助侵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 결성현(結城縣) 고산(高山)과 호응한다. 고구성산 봉수(高丘城山烽燧) 남쪽으로 결성현 고산과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서산군 도비산(都飛山)과 호응한다.

『신증』【궁실】 객관(客館) 조위(曺偉)의 객관 기문[記]에, “협성(俠城)의 송후(宋侯) 요년(遙年)이 근후(謹厚) 독실한 재질로 일찍부터 좋은 벼슬에 올라 당세에 영명(令名)을 날렸으며, 일찍이 서원(西原)의 부관ㆍ면양 군수(沔陽郡守)ㆍ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혜정(惠政)을 베푼 바가 있어 지금까지도 그를 칭송 사모함이 있다. 성화(成化) 병오년에 또 홍주 목사가 되어 나오니, 홍주는 호서(湖西)의 거읍(巨邑)이다. 그 땅이 기름지고 넓으며, 그 백성이 번성하고 많아서 난치(難治)의 고을로 일컬어 왔다. 그러나 송후는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고 친근하게 접하는 정책을 써서 권유나 지시 등의 조목을 간략히 하고, 번쇄(煩瑣)한 정령(政令)과 가세(苛細)한 것을 털어 없애니, 온 경내가 안온하여 백성들이 그의 임사(任使)를 즐거워하였다. 하루는 뒷 청사에 앉아 문부(文簿)를 고찰하고는 통판(通判) 조후(曺侯) 말손(末孫)에게 말하기를, ‘해우(廨宇)는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며, 대청(大廳)은 곧 삭망(朔望)으로 조회 받는 정아(正衙)인데 지세가 낮아서 염찰의 위엄이 없고, 제도가 협소하여 예(禮)를 행할 곳이 없는데다가 세운 연대가 오래되어 장차 꺾이고 무너질 것이니 어찌 이를 고쳐 세워 오랫동안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키지 않겠는가.’ 하니, 통판이 말하기를, ‘삼가 명에 따르겠습니다.’ 하여 합의를 본지라 이에 재목을 모으고 돌을 캐는 데 노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기유년 봄에 그 낙성을 고하게 되니, 지난날 낮았던 것이 높아지고, 좁았던 것이 넓어졌다. 그 모퉁이와 뜰을 높이고 규모와 제도를 확장하고는 흰 회로 바르고 단청(丹靑)으로 채색하니, 높고 크고 또 미려하여 한 고을의 미관(美觀)을 이루었다. 송후가 서울로 편지를 띄워 내 말로 기문[記]을 삼고자 하므로 나는 답하기를, ‘송후의 빛나는 성문(聲聞)이 일찍부터 조정 위에 전파되었고, 이어 금방(金榜)에 이름이 올랐으니, 마땅히 바로 요로(要路)에 올라서 대각(臺閣)에 출입할 것인데도, 늙으신 어버이가 있는 까닭으로 해서 그를 봉양코자 누차 지방관으로의 전보(轉補)를 청하여 여러 주군(州郡)으로 배회하면서 깨끗하고 기름진 봉양을 다하였으니, 이는 송후의 지극한 성효(誠孝)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요, 캐고 들추어 내지 아니하여도 백성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고, 치고 때리지 않아도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심복하여 촌간에서는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없으며, 온 고을의 경내가 함포고복(含哺鼓腹)의 낙이 있었으니, 이는 송후의 행정의 공적이 열읍(列邑)과 다른 점이다.’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효성과 고을을 다스리는 재능은 진실로 사책(史策)에 기록하여 전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이제 이 한 토목(土木)의 공사와 한 청사(廳舍)의 영선(營繕)이 어찌 송후를 위하여 칭찬하기에 충분하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나 내 여기서 느낀 바 있으니, 요즈음 각 주군을 살펴보건대 근년 이래로 거의 모두 일신하게 중수하여 기울고 무너진 것들이 열에 두서넛도 없을 뿐더러 그 제작한 것이 모두 굉장하고 화려하여 옛것의 갑절이나 되었으니, 어찌 옛날의 장인(匠人) 석공(石工)들은 모두 법도에 어두웠고, 지금의 목공[梓人]들은 모두 반영(般郢)의 교묘한 수법이 있어서 그러하겠는가. 이는 실로 조정이 청명(淸明)하고, 중외가 무사(無事)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고 물산(物産)이 은성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력(事力)에 여유가 있게 된 까닭이요, 또 옛날에 경영한 구조란 겨우 병란이 없는 틈을 타서 하였기 때문에, 그 초라한 창설(創設)이 저와 같았으나, 오늘날에 제작하는 자는 종용하고 한가하여 그 역량을 다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굉장하고 화려함이 이와 같은 것이니, 이 어찌 세도(世道)의 흥체(興替)에 관계되어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한 관해(官廨)의 영선이 송후에게는 비록 증익(增益)도 손실도 없을 것이지만 이로써 위로는 국가의 승평(昇平)을 볼 수 있을 것이요, 그 다음으로는 또한 수령의 현능(賢能)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이를 어찌 적게 평가하랴. 뒤에 오는 사람들도 이 제작한 바를 목도(目覩)하고 송후의 어짊과 오늘의 융성을 상상할 것이니, 송후의 이 공적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나는 송후께는 자제(子弟)들과 같은 반열이다. 그런데 글을 내리심이 두 번에 이른지라, 의리로 보아 사양할 길이 없어 우선 이것을 써서 보내드리는 바이다.” 하였다.

【누정】 계풍루(繫風樓) 객관 동쪽에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구름은 가벼워지고 바람은 급히 불어 가을철 다가오는데, 먼 손 누정에 올라 보니 마음 갑절 어둡구나. 물 많은 고장에선 한창 농어회 맛나는 계절인데, 고향은 멀리 기러기 소식 전하여 주기 바라네. 천 겹 푸른 숲은 높고 낮게 나누어졌고, 한 줄기 푸른 산이 앞뒤를 싸안았구나. 행장 꾸려 돌아가려 해도 가지 못하는 이 몸, 그러므로 장계응(張季鷹)의 현명한 데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였다. 『신증』 감사(監司) 조위(曺偉)가 영훈루(迎薰樓)로 이름을 고쳤다.

【학교】 향교 주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세천역(世川驛) 주 동쪽 3리에 있다.『신증』 지금은 주 남쪽 15리로 옮겼다. 용곡역(龍谷驛) 주 남쪽 45리에 있다. 여양원(驪陽院) 여양현에 있다. 인후원(仁厚院) 주 동쪽 23리에 있다. 홍천원 (弘天院) 주 북쪽 11리에 있다.

【불우】 청송사(靑松寺)ㆍ용봉사(龍鳳寺) 모두 팔봉산(八鳳山)에 있다. 삼존사(三尊寺) 삼존산(三尊山)에 있다. 영봉사(靈鳳寺) 팔봉산(八峯山)에 있다. 청광사(靑光寺) 청광산(靑光山)에 있다. 법화사(法華寺)ㆍ서방사(西方寺) 모두 월산(月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주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월산에 있다. 여단 주 북쪽에 있다.

【고적】 여양폐현(驪陽廢縣) 주 남쪽 37리에 있다. 여(驪) 자는 여(黎) 자로도 쓴다. 본래 백제의 사시량현(沙尸良縣)인데 혹은 사라현(沙羅縣)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신량(新良)으로 고쳐 결성군(潔城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현종(顯宗) 9년에 본주에 붙였다. 고구폐현(高丘廢縣) 주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우견현(牛見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목우(目牛)로 고쳐 이산군(伊山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본주에 붙였다. 흥양폐현(興陽廢縣) 주 남쪽 50리에 있으며, 옛 이름은 원군(遠軍)이었던 것을 고려 현종 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본주에 붙였다. 합덕폐현(合德廢縣) 주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덕풍현(德豐縣)에 붙여 부곡(部曲)으로 삼았던 것을, 고려 충렬왕(忠烈王) 24년에 이 고을 출신인 환자(宦者) 황석량(黃石良)이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 은총을 받은 바 있어 현(縣)으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본주에 붙었다. 용천부곡(龍泉部曲) 주 남쪽 30리에 있다. 지금은 용천리(湧川里)라 일컫는다. 대산부곡(大山部曲) 주 서쪽 90리에 있다. 서산군(瑞山郡)의 동북쪽 마을까지 넘어 들어갔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궁경부곡(躬耕部曲) 주 남쪽 20리에 있다. 화성부곡(化城部曲) 주 남쪽 50리에 있다. 운천향(雲川鄕) 주 서쪽 40리에 있다. 해미현(海美縣) 북쪽 마을과 서산군의 동북쪽 마을까지 넘어 들어갔다. 정성향(政聲鄕) 주 남쪽 32리에 있다. 용화향(用和鄕) 주 남쪽 35리에 있다. 흥고향(興古鄕) 주 남쪽 52리에 있다. 옥사금소(玉賜金所) 주 남쪽 27리에 있다. 그 동쪽에 우물이 있는데, 옥사정 (玉賜井)이라 부른다. 상전소(上田所) 주 남쪽 74리에 있다. 청양현(靑陽縣) 남쪽 마을까지 넘어 들어갔다. 고이산소(高伊山所) 고구현(高丘縣) 서쪽 48리에 있다. 명해소(明海所) 신평현(新平縣) 북쪽 1백 14리에 있다. 오사소(烏史所) 주 남쪽 34리에 있다. 마여소(馬餘所) 주 북쪽 15리에 있다. 미륵사(彌勒寺) 구지(舊址)가 주 동쪽 1리에 있는데, 돌담이 남아 있다. 여양산성(驪陽山城) 돌로 쌓았으며, 주위는 6천 40척이다.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월산성(月山城) 돌로 쌓았으며, 주위는 9천 7백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명환】고려 이함(李涵) 이규보(李奎報)의 아들이다. 이행검(李行儉) 모두 지주사(知州事)이다.본조 안등(安騰)ㆍ신유정(辛有定)ㆍ유사눌(柳思訥)ㆍ전흥(田興)ㆍ김예몽(金禮蒙)ㆍ정자제(鄭自濟) 모두 본주 목사가 되었다. 조석문(曺錫文) 안산군사(安山郡事)에서 본주의 목사가 되었다. 김구(金鉤)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명신(李明晨) 목사가 되었다.『신증』 이의무(李宜茂) 목사가 되어 치적이 본도의 최상으로 표리(表裏 옷감 한 벌)의 하사를 받았다. 안요경(安堯卿) 목사가 되었다.

【인물】고려 홍규(洪規) 태조(太祖)를 섬겨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진준(陳俊) 여양(驪陽) 사람으로 용력이 있어 군졸의 대열에서 발탁되어 공로를 쌓아서 위장군(衛將軍)이 되었다. 명종(明宗) 때에 여러 번 벼슬을 전전하여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이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승진되었다. 경계(庚癸)의 화란 때에 문신(文臣)들의 집이 진준에게 힘입어 온전히 살아난 자가 많아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음덕이 있어 그 뒤가 반드시 창성할 것이다.” 하였다. 진식(陳湜) 진준(陳俊)의 손자로 과거에 올라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벼슬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다. 진화(陳澕) 진식(陳湜)의 아우로, 신종(神宗) 때에 과거에 올라 한림원(翰林院)에 뽑혀 들어갔고, 우사간(右司諫) 지제고(知制誥)로 지공주사(知公州事)로 나왔다가 죽었다. 시사(詩詞)를 잘하여 그 말이 맑고 미려하였으며, 젊어서는 이규보(李奎報)와 같이 이름을 떨쳤다.본조 이첨(李詹)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장원으로 과거에 뽑혀 세 번 전전하여 정언(正言)이 되었다. 일찍이 아홉 가지 규간(規諫)의 말을 올리기를, “첫째 덕을 길러야 하며, 둘째 일을 멀리 생각하여야 하며, 셋째 허물을 고쳐야 하며, 넷째 근본에 힘써야 하며, 다섯째 자기 몸을 겸허(謙虛)하게 가져야 하며, 여섯째 은혜를 베풀어야 하며, 일곱째 같은 유(類)는 유대로 나란히 포열(布列)하여야 하며, 여덟째 정사를 밝게 하여야 하며, 아홉째 백성의 업(業)을 보호 육성하여야 한다.” 하였다. 누차 승진하여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는데, 어떤 일로 말미암아 영산(靈山)의 계성(桂城)으로 귀양갔다가 얼마 안 되어 석방되었다. 본조에 들어와서 전서(典書), 집현전 직학사(集賢殿直學士),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등을 역임하고 죽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며 그의 저술인 《쌍매당집(雙梅堂集)》이 세상에 간포(刊布)되어 있다. 이서(李舒)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효행이 있었다.

【효자】본조 복한(卜僴) 효행으로 정문을 세웠으며,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한원발(韓元發) 지방 아전이다.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웠다.

【제영】 파명해상성(波明海上城) 이색(李穡)의 시에, “산중 길은 구름 깔려 어두운데, 바다 위에 임한 성은 물결도 맑다.” 하였다. 비예연운유고성(睥睨連雲有古城)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높은 평원 바둑판처럼 그 형세 펀펀한데, 비예가 구름과 연한 옛성이 있구나. 아득히 포열해 있는 바다 위 산에 날이 저물어 가고, 수북수북하게 올라온 벼 기장에는 비가 처음 개었다. 밭 사이로 들밥 이고 가는 촌아낙네 어린아이 데리고 가고, 언덕 위에 밭가는 어미소엔 송아지 따라다닌다. 동네 숲에서 모여 산신제는 끝나고 사람들은 모두 취했는데, 흔들거리고 돌아가는 길에는 더운 바람도 맑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현종조에 홍양현(洪陽縣)으로 강등시켰다가 고쳐 다시 승격시켰다. 순조(純祖) 조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주남(州南) 끝이 10리. 주북(州北) 끝이 10리. 성지(城枝)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도사(島史) 본래 오사(烏史)였는데 서남쪽에 있으며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번천(蕃川)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용천(湧川) 본래는 용천부곡(龍泉部曲)으로, 서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 고남(高南)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 고북(高北) 서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 위의 두 면(面)은 고구(高邱)의 옛 현(縣)이다. 운천(雲川) 본래는 운천향(雲川鄕)으로, 북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60리인데 건너서 서산(瑞山) 동해 미북(美北)에 있다. 합남(合南) 동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50리. 합북(合北) 동북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60리. 위 두 면은 합덕(合德)의 옛 현(縣)이다. 현내(縣內) 동북쪽으로 처음은 80리, 끝은 1백리. 신남(新南) 동북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70리. 신북(新北) 동북쪽으로 1백리, 끝은 1백 10리. 위 세 면은 신평(新平)의 옛 현(縣)이다. 송지곡(松枝谷)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 홍안송(洪安松)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유곡(酉谷)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5리. 궁경(躬耕) 본래는 궁경부곡(躬耕部曲)인데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얼방(乻方) 남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50리. 금동(金洞) 동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홍천(弘天)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치사(雉寺)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대감개(大甘介) 위와 같음. 평리(坪里)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우파(牛坡) 남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65리. 화성(化城) 본래는 화성(化城)의 부곡(部曲)인데 남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60리. 흥구향(興口香) 본래 흥구(興口)의 옛 고을이었는데, 처음과 끝이 모두 위와 같다. 상전(上田) 남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70리.

【성지】 읍성(邑城) 옛 주류성(周留城)인데 둘레가 5천 8백 50척이고 샘이 셋, 문이 네 개, 곡성(曲城)이 여덟 개다. 월산고성(月山古城) 고려 태조(太祖) 11년에 운주(運州)와 옥산(玉山)에 성을 쌓고 수졸(戍卒)을 두었는데 둘레가 9천 7백척이요, 우물이 하나이다. 여양고성(驪陽古城) 둘레가 6천 40척, 샘이 둘. 고구고성(高邱古城) 지금 성산(城山)이라 하는데 옛터가 있다. 흥양고성(興陽古城) 옛터가 있다. 합덕고성(合德古城) 옛터가 있다.

【영아】 전영(前營) 인조(仁祖) 조에 세웠다. ○ 전영장(前營長) 한 사람. ○ 속읍으로 홍주(洪州)ㆍ서천(舒川)ㆍ임천(林川)ㆍ보령(保寧)ㆍ한산(韓山)ㆍ청양(靑陽)ㆍ정산(定山)ㆍ홍산(鴻山)ㆍ비인(庇仁)ㆍ남포(藍浦).

【사원】 노은서원(魯恩書院) 숙종 병진년에 세워졌고, 임신년에 사액되었다.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 모두 과천(果川)에 보임. 성승(成勝) 성삼문의 아버지로 세조 병자년에 대신들과 같이 순직하였다. 벼슬은 도총관(都摠管)이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별사(別祠)에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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