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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단상/기타

[스크랩] 양저우 여행3 - 양저우 운하를 보면서 조선 선비 최부의 표해록을 회상하다!

by 竹溪(죽계) 2017.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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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저우 여행3 - 양저우에 도착해 운하를 보면서 조선 선비 최부의 표해록을 회상하다!

 


여행 8일째인 10월 26일 양자강 남쪽에 위치한 오나라 손권의 수도 전장(진강) 에서

버스를 타고 창장(장강) 이라 불리는 양자강을 건너 북쪽에 자리한 대운하 도시

양저우(楊州 양주) 에 도착해 운하를 구경하자니 불현듯 최부의 표해록 을 떠올립니다.



지금 세계는 양복을 입고 자동차를 타며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서구문명 하에 살지만

 명나라 시대만 해도 4대 발명품인 나침반과 종이, 인쇄술과 화약을 발명한 중국이

앞섰건만 서양은 대항해시대 를 거쳐 신대륙을 발견하고 산업혁명 으로 아시아를 앞지릅니다.



특히나 우리 조선은 동방예의지국(?) 이라 ...외국을 침략하여 정벌한 일도 없고

유교에서“신체발부는 수지부모(母)라고 해서

먼저 죽는 것은 물론이고 몸을 상해 부모님 걱정을 끼치는 걸 불효로 생각한지라!!!



 1,895년 서울에 온 선비가 갑오개혁 단발령 으로 머키카락이 잘리자 불효라고 목매죽기도

했으니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거나 무역하러 가는일도 없었지만 조난사고로

중국에 표류한 기록 이 있으니 그전에는 신라승 혜초의“왕오천축국전”이 있을뿐이지요?



최부(崔溥) 는 성종때 제주 추쇄경차관으로 부임하였다가 1,488년 정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던중 제주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표류 하게 되었으니

일행들은 배를 띄운 최부를 원망하며 하늘에 빌면서 초조감과 절망으로 사색이 됩니다.



일행 44명이 탄 배가 표류하여 생사를 넘나드는 14일간의 표류끝에 천신만고로 중국 절강

연해 에 표착하였는데 두차례나 해적을 만나 짐을 뺏기고 모진 매질을 당하며

죽음의 순간을 여러차레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나 왜구로 오인되어 고초를 겪습니다.



 2차례 해적에게서 간신히 벗어나 왜구가 아니냐 하는 의심에서 풀려 북경으로 호송되는데

일행은 중국 명나라 관인의 호송을 받게되어 절강성 도저소에서 출발하여

영파· 소흥을 거쳐 운하를 따라 항주· 소주를 지나 이 도시 "양저우(양주)" 에 이릅니다.



일행은 계속 북상해 산동· 천진을 거쳐 북경에 도착하여 명나라 황제 효종(孝宗)

 을 알현하였으며 이후 귀로에 올라 서울에 도착한 최부는

왕명으로 6개월간의 중국 견문을 일기체 기행문 으로 저술해 바칩니다.



그러고는 최부는 부의로 포 50필과 마필을 지급받아 나주로 내려가 부친상을 치르는데

상중에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르니 만 4년간 부모상 을 치르게 됩니다.



마침내 1,491년 서울로 상경해 성종으로 부터 사헌부 지평 에 제수되었으나...

사간원에서 한달이 넘도록 동의해 주지 않아 부임하지 못하는데

중국에서 돌아와 상주된 몸으로 견문기를 쓴 것이 "명교(名敎) 에 어긋나는 행위" 였다나요?



성종은 최부가 상주의 몸 으로 기행문을 쓴 일은 자기가 시켜서 한 일이고 최부가

4년 동안이나 여묘(廬墓) 살이 를 할 만큼 효행행했다고 두둔하며 어렵게

관철시키는데 1년후 홍문관 교리로 임명될때도 대간은 전날의 일을 들어 다시 반대합니다.



명년정에 최부가 표착했던 중국 절강성 영해현 월계촌에는 현지의 행정당국과

최씨 문중의 협조로 “최부표류사적비 (崔溥漂流事迹碑)”가 세워졌습니다.



최부가 쓴 일기체 기행문은 그 양이 방대한지라 양주 부근을 여행한 부분만 일부 옮겨봅니다.

소주를 떠나 양자강에 이르기까지는 물길이 순조로웠으나 통진에 이르러 물이 얕아

배를 띄울수가 없으므로 양자강으로 나가려면 밀물때 를 기다리는데 호송관 이절이 이별한다.



“수행하는 길에 누차 보살펴 주었고 은혜를 입었습니다. 오늘 이별하여 당신은

양주 향하고 우린 의진으로 가지만 늦봄에 북경으로 가는데 회동관에 보러 가겠습니다.”



장강(양자강) 수로는 서쪽으로 한수와 면수에 접하고 북쪽은 회수와 사수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복건과 절강에 닿으니 사방에 통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망망한 물 위로 난 길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 동안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새삼스러우며 앞으로 갈 길이 아마득하여 감회를 금치 못한다.



1,489년 2월 22일 영파를 출발한지 한달만에야 드디어 양자강 에 이르렀는데

강가 5리에 걸쳐 육지에서 배를 밀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잇따랐다.



돛을 올려 강 한가운데에 이르니 전장(진강)의 금산 밑에서 돌고래

물결을 가르며 지나가는 것이 마치 전마가 무리를 지어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서진도(西津渡) 석두석제에 도착하니 나무 장대를 물 가운데 세워 긴 다리를 만들었는데

왕래하는 사람들이 닻줄을 다리 밑에 매달고 오르니 강회(江淮) 의 경치 가 훌륭하다.



2월 23일 아침에 광릉역을 떠나 양주(楊州 양저우) 를 지나는데.... 

양주부는 옛날 수나라 강도(江都) 의 땅으로 강좌 (江左 강북) 의 큰 진이다.



양주 는 번화가가 10리에 걸쳐있고 주렴(珠簾) 과 24교, 36피(陂) 의 경치는 여러 군 중에

으뜸이었고 봄바람이 성곽을 어루만지고 생황의 노래가락이 귀에 가득한 곳이다.



우리들은 배를 타고 지나갔기 때문에 양주 시내는 보지못하고 단지 보이는 것은

진회루 (鎭淮樓) 뿐으로 누는 곧 양주성의 남문으로 3층인데 지나온 곳에 갑이 2개 있다.



소백역에 이르니 북쪽에는 소백태호가 있는데 노를 저어 호수 주변 3리 정도를 가니

소백체운소에 이르렀는데 물이 넘치고 바람이 불어서 밤에 호수를 건널수 없다.



양자강에서 황하에 이르는 동안, 소백호, 고우호, 계수호,

백마호 등과 같은 큰 호수가 많아 나중에는 물결만 봐도 울렁일 지경이었다.


 

새로 온 호송관 양주위 백호 조감이 몇년전에 양주 땅에 표류했던 조선인의 얘기를 꺼낸다

“6년 전에 당신 나라 이섬(李暹) 이 표류해 이곳에 도착했다가 귀국했는데 알고 있소?”



최부는 제주 정의현감 이섬 이 표류하였다가 귀국한 전말을 묻고 호송관은 답하니...

양주 사람들이 모두 한 마디씩 하여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이섬을 호송했던 사람도 있었다.



“이섬은 고향이 아득히 멀다고 근심했었소. 지금 당신의 처지를 보면 걱정이 되겠소이다.”

“이섬은 단지 길이 멀다고 근심했지만 내가 슬퍼하는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직 염(殮) 을 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일흔에 가까운 노인으로 집에 계시는데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며 나그네 길은 멀어 비통한 마음에 하늘이 노랗고 앞이 깜깜하오.”

이제껏 한달 여를 뱃길로 왔는데 또 북경까지 두달 이상 갈 일을 생각한다....



북경까지 2달 여정을 생각하니 막막함이 갈수록 더해지는데 하늘은 어둑해 날씨가

흐려지니 밤인데도 뱃길을 재촉해 백양하 언덕에 정박했다가 새벽에 길을 나서

도원역을 지나는데 부영이 와서 역 서쪽이 유비, 관우, 장비의 삼결의묘 라고 일러 줍니다. 



배는 여량산의 암석 골짜기를 흐르는 여량홍의 급류 를 향해 나아가는데 보통의 운항기술

로는 넘어가지 못하니 따로 홍부(洪夫) 를 설치하여 뱃길을 도왔다.

급류가 흐르는 언덕에 돌로 둔덕을 쌓고 배를 몰수 있는 길을 만드니 대나무로 만든

닻줄을 사용해 끌어당기는데 한척을 끌어올리려면 100명의 인부와 10마리의 소 가 필요하다.



여량홍의 양옆 수면으로는 돌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가파르고 험한 바위가 높이 서 있다. 

 꼬불꼬불하던 강의 흐름이 갑자기 탁 트여 세차게 밀어닥쳤다.

그 세찬 기세는 바람을 내뿜으며 벼락같은 소리를 내니 숙련된 홍부 들이 작업을

하지만 작은 배는 거센 물결에 언제 뒤집힐지 몰라 최부 일행은 낯빛이 하얗게 질립니다.


 

최부는 "사대부" 로 중국 해안에 도달하여 왜구로 오인 받았을 때나 왜구의 혐의가 풀린뒤

중국 관헌을 접하게 되었을 때도 조선 관인으로서의 의연한 언행 으로 일관하였습니다.



바다에서 태풍을 만났을때도 일행들이 살기 위해 기도 올리자는걸 감연히 거부했으며

중국 고전(古典) 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져 중국 관헌의 행위가

법도에 어긋날때 호송당하는 을의 처지임에도 논쟁을 벌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일행이 표류 끝에 도착한 절동 지역은 천태산과 보타산을 비롯하여 불교가 번성한 곳인데

처음 상륙하여 왕을원을 만났을 때 "조선에도 불교가 있느냐" 는 질문을 받습니다.

최부는...... "우리나라에는 불법을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유학) 만을 숭상 하여 집집마다 효제충신으로서 업을 삼는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최부가 표착한 강남(江南) 지방에는 신라와 고려의 사신과 상인, 승려 들의 족적이 있으니

항주 팔반령에 의천 대각국사와 관련이 있는 고려사(高麗寺) 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는 "그것은 고려인이 세운 것 으로 지금 우리

조선과는 무관한 것" 이라 하여 애써 외면하니 "불교를 미신" 으로 보고 배척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고구려가 수당 을 물리친데 대해서는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 있는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방법이 있었으며 병졸은 모두가 윗사람을 친애 하여

죽은 까닭으로 백만 군사를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오." 라고 자부심 을 보입니다.



그럼 "고려는 남의 나라" 이고 "고구려는 선조의 나라" 라는 뜻일러나?

하지만 그 고구려가 결국에는 내분이 일어나 형제간에 서로 살육하고 막리지인 큰형

남생이 중국에 투항해 당나라군 길잡이 가 되어 조국을 멸망시킨건 외면하네요?



거기에 무슨 "친애" 가 있다는 뜻인지?  김춘추 가 당나라 태종과 협약하기를

"백제는 신라가 그리고 고구려는 당나라가 차지"

하기로 협약했으니 신라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리가 없거늘.... 



신라는 평양에서 당나라군을 만나 고구려를 멸망시킨뒤 황해도 만을 거두었고

훗날 고려가 발해 유민을 받아들인걸 쳐도 고구려인 20% 나 거두었나?



수당시대 오랜 전쟁으로 고구려에 대한 공포 에 질린 중국은 고구려 종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고구려인 80% 는 중국으로 잡혀가거나 만주에서 흩어져 사라졌거늘....

 유학에 심취하다 보니 불교를 미워하는 마음이 극에 달한지라 고려 유적도 외면한 것이리라!



“표해록(漂海錄)”은 기요다 군칸이 일본어로 번역했는데 주자학자 야먀자키 간사이는

"지금 중국에서 공자와 맹자가 장수가 되어 우리 나라를 침략해 온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 가운데 공맹을 배우는 자 라도 마땅히 무장하고 나가 싸워

그들을 붙잡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이것이 공맹의 도" 라고 했다나요....



우리나라 서남해에서 동중국해 연해지역으로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해로겨울에는

한국에서 중국으로, 여름에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계절풍이 불고 조류가 흐르니

따라서 신라와 고려가 이 해로로 무역했거늘 유학자 최부는 무역에는 전혀 관심이 없네요?



표해록 외에 1757년에 이지항 이 부산에서 표류하여 왜의 북해도- 대판- 대마도를

통해 부산으로 귀국한 후 표주록을 남겼다. 또 1771년 장한철

제주에서 표류하여 유구- 청산도를 거쳐 제주로 귀한한후 표해록을 저술하였습니다.



1797년 이방익 이 제주에서 표류하여 복건성- 북경- 요동을 거쳐 귀국한 후에는

표해가를 남겼으며 그외에도 1805년 문순득 은 우이도에서 표류하여

유구- 여송- 마카오- 북경을 거치는 표해록을 기록하였으며 최두찬 은 승사록을 남깁니다.



양저우의 운하를 구경하며 최부의 표해록을 회상하며 걷다가 운하야 끝이 없으니....

도중에 도로로 올라와서는 호텔에서 1km 정도 거리인 중국 정원 개원 에 도착합니다.



여긴 특이하게도 정원을 만든 이가 하도 "대나무" 를 좋아한지라..... 정원에

무수히 많은 대나무를 심고는 그 잎의 모양 을 본따 이름을

"거위엔 介园(개원)" 으로 붙였다고 합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출처 : 중국여행동호회
글쓴이 : 바이칼2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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