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기 선생은 명백한 사육신 |
■ 방송대 학보 1252호 ꡐ고전문학기행ꡑ 반론
김종성(무역학과 교수)
역사를 논하고 연구함이 정말 어렵고 중한 일이란 것은 주지의 사실일진대 하물며 이를 전공하지 않은 교수로서는 조심성이 훨씬 더 앞서는 것 같다.
단종복위 육신사건(병자사화 1456. 6 세조2년)의 사육신은 추강 남효온(1454~1492) 선생이 쓴 `육신전'에 의거하여 지금까지 통속적 관념 속에 여섯 분으로 믿어왔고 이는 초․중․고교의 관련 교과서는 물론 육신관계의 각종 논저 속에서도 무비판적으로 인용되고 기정사실화 되어 왔다. 그러나 남효온 선생은 병자사화 당시 2살의 어린아이였기에, 그 후 그가 옮겨 들은 부분을 정확하게 기술치 못하였거나 떠도는 이야기들을 그대로 훗날 육신전에 기록함으로써 후대까지 그렇게 인정되어 온 것 같다. 하지만 유일한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공개됨에 따라 남효온의 육신전 중 유응부조(條)의 불복과 주요경력은 충의공 김문기 선생의 행적으로 입증․판명됨으로써 학계의 비상한 관심거리로 떠올랐고 이에 많은 학자들이 김문기 선생의 사육신환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그 후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과 문교부장관 및 서울시의 사실 확인에 따라 김문기 선생이 사육신 중 한 분이라는 명확한 판단과 함께 `사육신공원'에 선생의 가묘를, 의절사에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행여라도 권력으로 김문기의 묘를 사육신묘에 썼다는 소문 등은 위의 내용 등을 통하여 볼 때 전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당대 석학들로 구성된 국사편찬위원회(1977년)에서는 왕조실록에 의거하여 학술적 연구와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김문기가 원 사육신으로 판정된다고 만장일치로 결의함으로써 서울시가 김문기의 묘를 사육신묘역에 모시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해가 상반되는 측(?)이나 이론적으로 부족한 경우 등에 따라서는 의도적으로 특정권력(특정인)을 빙자하여 이 묘를 썼다고 매도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 애달픔을 금치 못한다.
10․26 사태 후 보안사․국보위․국회 등에서 이 소문을 엄중히 조사하였으나 위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의에 잘못이 없었음은 물론 소문 또한 헛소문으로 가려졌다. 뿐만 아니라 문제 제기된 특정인이 사형된 뒤에 새로이 구성된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ꡒ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김문기를 현창하여야 된다. 사육신묘역에 김문기의 묘를 써라ꡓ고 결의한 것은 타당하다고 1982년에 재확인하였다. 이는 사육신묘역에 당연히 모실 분을 모신 것을 뜻한다. 당시 학술원장국사편찬위원이였던 이병도 박사는 국사대관(國史大觀, 1983)과 한국유학사략(韓國儒學史略, 1986)에 사육신을 김문기,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으로 고쳐 써서 간행을 했다.
원래 사육신은 김문기를 포함한 6인이었다. 그래서 조선조의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 세조2년 6월 병오조에는 수레에 찢겨 죽임을 당한 38명, 옥사한 2명, 자살한 2명 중에서 특별히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6인에 대하여만 개별적으로 활동상을 열기하고 그 중에서도 김문기가 박팽년, 성삼문과 단종복위모의를 하면서 박팽년, 성삼문에게 연회장 안에서 세운검(雲劒)으로 하여금 세조를 살해하는 일을 분담시키고 스스로는 단종복위의 성패를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역할인 군(軍)동원을 맡은 내용이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동월 경자조 및 정미조의 국문기록 등의 내용까지를 종합하여 볼 때 김문기는 거사의 주체요 수장(시셋말로 몸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몸통의 유신 중 김문기 등 왕조실록의 육신이 사육신으로 꼽혔음에도,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러한 내용의 왕조실록은 공개되지 않고 사건 당시 2세였던 남효온이 커서 오전되기 쉬운 소문을 적은 육신전만을 세상에서는 읽게 되었다. 그리고 육신전에서는 왕조실록의 위 육신 중 5인은 같고 김문기만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왕조실록에 언급된 사육신 중에 국문에 불복하고 재상과 함길도 절제사를 지낸 사람은 오직 김문기 한 사람뿐이다. 그러므로 이는 김문기가 타인으로 오전된 것임을 확실히 받침해 주고 있는 증거임을 알 수 있다.
누가 역사를 왜곡하는가? |
■ 방송대 학보 1275호 김종성 교수 기고 반론
손종흠(국문학과 교수)
우리에게 있어서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역사를 통하여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미래의 길을 알려준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늘 현재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를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떨게 한다.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 중 여섯 사람을 특별히 사육신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사육신으로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 개, 유성원, 유응부를 꼽는데, 이를 20세기말인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유응부 대신 김문기를 넣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묘를 더하는 웃지 못할 역사왜곡이 이루어진 것이다. 세조 이후 조선조의 역대 왕들이 모두 인정했던 여섯 사람을 현대에 와서 국사편찬위원회가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유일의 정사이며, 그 엄정성으로 인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인된 <조선왕조실록>만 찾아봐도, 이 주장의 허구성이 금방 드러난다. 유응부가 사육신에 포함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여러 곳에 나오고 있는데, 그 중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ꡒ단종께서 손위하던 날 죽음으로 절개를 온전히 지킨 이로는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가 있고, 살아 있으면서 의리를 지킨 이로는 원호․김시습․이맹전․성담수․남효온 조여가 있는데(端宗遜位之日其死而全節者 有若成三問朴彭年河緯地柳成源兪應浮六臣 其生而守義者有若元昊金時習李孟專成聃壽南孝溫趙旅六人)ꡓ. 이 기록은 숙종 29년인 1703년 10월 13일에 있었던 상소문을 실록에 넣은 것이다. 이미 세조 당대에 유응부를 사육신의 하나로 꼽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기록은 그 뒤에도 계속되는데, 인종시대에도(인종1년:1545), 효종시대(효종3년:1652)에도, 영조시대(영조52년:1776)에도, 정조시대(정조15년 및24년:1791,1800)에도, 순조시대(순조11년:1811)에도 유응부가 사육신임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런데, 수 백 년이 지난 1977년에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실록의 세조2년(1456) 경자일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놓고 명백한 사실이 뒤집히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ꡒ이개에게 곤장을 치고 물으니, 박팽년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김문기만이 공초(供招)에 불복(不服)하였다.(杖訊李塏對如彭年餘皆服招惟文起不服).ꡓ 이 기록은 ꡐ다른 모든 사람들은 단종 복위를 위해 세조를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에 대해 인정했으나 김문기 혼자만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불복했다ꡑ는 것이다. 이것을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특별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서, 김문기야말로 사육신에 들어야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즉, ꡐ다른 사람들은 모두 세조에게 복종했으나 오직 김문기만이 세조에게 복종하지 않았다.ꡑ 내로라하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들이
왜 이처럼 어이없는 해석을 하고 말았던 것일까?
항간에서는 당시의 시국 상황과 이러한 상황에 힘입은 특정권력인의 비뚤어진 가문존숭의식이 작용한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제대로 인식해야할 것은 똑바로 알아야 조상을 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해프닝만 없었더라면 김문기는 생전의 행적만으로도 존중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예컨대, 정조 시대 마련된 단종능의 배식단 서열을 보면 육종영, 사의척, 삼상신, 삼중신, 양운검, 사육신 등으로 되어있는데, 김문기는 네 번째 서열인 삼중신(三重臣)에 자리하고, 사육신은 여섯 번째 서열에 자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가문의식이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의 조상을 두 단계나 강등시켜 사육신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정작 김문기가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과연 기뻐할 것인가? 부끄러워 할 것인가? 우리 모두 함께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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