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애틋한 사연들을 남기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사육신들은 그들이 남긴 문학 작품으로
우리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이들은 주로 시조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했는데, 성삼문의 '수양산 바라보며', 박팽년의 '가마귀 눈비맞아'
이개의 '방안에 혓는 촛불' 등을 보면 누구도 꺾지 못할 굳은 절개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무장으로서 사육신의 반열에 든 유응부는 문인들이 남긴
작품과는 사뭇 다른 시조를 남기고 있어서 흥미를 끈다.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말가 落落張松이 다기우려 가는구나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 하리오". 간밤에 불던 바람은 그 당시 왕실의 어지럽고 어려운 상황을 표현한 것이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몰아치는 눈서리는 수양대군을
암시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어지러운 상황에서 일어난 정변은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들을 마구 죽이고 있으니 낙낙장송이 기우러져 간다고 한 것이다.
거사의 일정이 바뀌어지자 실패할 것을 예견한 유응부는 마지막 구절에서 못다 핀 꽃이 스러져 간다고 슬퍼하고 있다. 계유정란의 횡포를 풍자하면서
세조 일파의 무차별한 인재 살육을 개탄한 작품으로 어두운 시대의 아픔과 나라에 대한 걱정을 무장다운 기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사육신의 묘소는 서울 노량진 부근에 있는 아차고개에 자리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그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이 자리에 묻었다고도 하고, 남쪽에 사는 어떤 선비가 사육신을 살릴 증거를 가지고 오는 도중 이고개에서 사육신이
이미 처형되었다는 말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 라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이곳에 묻었다고도 한다. 이곳에는 원래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 후 하위지, 류성원의 허묘가 만들어졌다. 사육신의 묘역을 돌아보면 사육신이 아닌 김문기의 묘가 나란히 있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데 이는 유신 정권 말기에 권력의 핵심에 있던 김재규가 자신의 선조인 김문기를 기리기 위하여 함께 만들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후손이 선조를 욕보이는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겨울이 다가오는 이 때에 사육신을 기린 의절사라는 사당과 함께 그들의 묘소를 돌아보며 시대의
질곡을 충의와 절개로 지켜내려 했던 선비들의 기상을 느껴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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