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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의 문장 용재총화기록

by 竹溪(죽계) 2006.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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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총화 제1권



○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崔致遠)에서부터 처음으로 발휘되었다. 최치원이 당 나라에 들어가 급제하니 문명(文名)이 크게 떨쳐 지금은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다. 이제 그의 저서를 통하여 보면, 시구에는 능숙하나 뜻이 정밀하지 못하고, 사륙문체(四六文體)에는 재주가 있으나 말이 단정하지 못하였다. 김부식(金富軾)과 같은 이의 글은 풍부하나 화려하지 않고, 정지상(鄭知常)의 글은 화려하나 드날리지 않았고, 이규보(李奎報)는 눌러[押] 다듬을 줄 알았으나 거두지 못하였으며, 이인로(李仁老)는 단련(鍛鍊)되었으나 펴지 못했고, 임춘(林椿)은 진밀(縝密)하나 통하지 못하였으며,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적실(的實)하나 슬기롭지 못하였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는 노건(老健)하나 아름답지 못하였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은 온자(醞藉)하나 길지 못하였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은 순수하나 종요롭지 못하였고,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은 장대(張大)하나 검속(檢束)하지 못하였다. 세상에서 칭하기를,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시와 글에 모두 뛰어나 집대성하였다.” 하나 비루하고 소략한 태(態)가 많아서 원(元) 나라 사람의 규율(規律)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당(唐)·송(宋)의 영역에 비길 수 있겠는가. 양촌(陽村 권근(權近))·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문병(文柄)을 잡기는 하였으나 목은(牧隱)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며, 춘정은 더욱 비약(卑弱)하였다. 세종(世宗)께서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들을 맞아들였는데, 고령(高靈) 신숙주(申叔舟)·영성(寧城) 최항(崔恒)·연성(延城) 이석형(李石亨)·인수(仁叟) 박팽년(朴彭年)·근보(謹甫)성삼문(成三問)·태초(太初) 유성원(柳誠源)·백고(伯高) 이개(李塏)·중장(仲章) 하위지(河緯地)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모두 한때에 이름을 떨쳤다. 근보의 문장은 호종(豪縱)하나 시(詩)에는 짧고, 중장도 대책문(對策文)이나 소장(疏章)에는 능하나 시를 알지 못했으며, 태초는 천재로 숙성(夙成)하였으나 견문이 넓지 못하였다. 백고(伯高)는 맑고 뛰어나 영발(英發)하고 시도 정절(精絶)하였으나, 선비들이 모두 박인수를 집대성(集大成)이라고 추대하였으니, 그는 경술(經術)·문장·필법(筆法)을 모두 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 주살(誅殺)을 당하여서 저술한 것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영성(寧城)은 사륙문체(四六文體)에 능하고, 연성(延城)은 과거(科擧)의 글에 능하였다. 그러나 고령(高靈)의 문장과 도덕만이 일대(一代)의 존경을 받았고, 그 뒤를 따를 사람은 서달성(徐達城)·김영산(金永山)·강진산(姜晉山)·이양성(李陽城)·김복창(金福昌)과 나의 백씨(伯氏)뿐이다. 달성의 문장은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시는 퇴지(退之 한유(韓愈))의 체(體)를 본받아 손의 움직임에 따라 아름답기 짝이 없는 글이 되었고,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았다. 영산은 책을 읽으면 반드시 외기 때문에 문장의 체(體)를 얻어서 그 글이 웅방호건(雄放豪健)하여 그와 문봉(文鋒)을 다툴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성품이 검속하지를 못하여 시의 압운(押韻)에 착오가 많았다. 진산의 시와 글은 전아(典雅)하여 천기(天機)가 절로 무르익어 여러 선비들 가운데서도 가장 정밀하고 빼어났다. 양성의 시와 글은 모두 아름다워 정교한 장인이 다듬고 새긴 것과 같아서 다듬은 흔적이 없었다. 나의 백씨(伯氏)의 시는 만당(晩唐)의 체를 얻어서 떠가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막히는 데가 없었다. 복창은 타고난 자질이 일찍 성숙되어 반고(班固)를 따랐으니, 문장이 노건(老健)하였다. 일찍이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엮었는데, 일을 서술한 것이 대개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일대(一代)에 이름을 떨쳐서 문학이 빛나고 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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