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제8권 경기(京畿)
과천현(果川縣)
동쪽으로 광주(廣州) 경계까지 13리이고, 남쪽으로 수원부(水原府)까지 34리이며, 서쪽으로 금천현(衿川縣) 경계까지 20리이고, 안산군(安山郡) 경계까지 28리이며, 북쪽으로 노량(露梁)까지 20리이고, 서울까지 3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율목군(栗木郡)인데 하나는 동사힐(冬斯肹)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년에 과주(果州)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광주(廣州)에 예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삼았으며, 14년에 금천(衿川)과 병합하여 금과(衿果)라고 일컬었다가 두어 달 뒤에 파하였다. 세조 때에 금천으로 와서 현에 합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각각 복구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군명】 율목(栗木)ㆍ동사힐(冬斯肹)ㆍ율진(栗津)ㆍ부림(富林)ㆍ부안(富安)ㆍ과주(果州).
【성씨】본현 손(孫)ㆍ이(李)ㆍ전(田)ㆍ신(愼)ㆍ안(安)ㆍ변(邊)ㆍ최(崔).
【형승】 산은 관악(冠岳)과 연하고, 물은 청계(淸溪)로 흘러간다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산은 관악과 연하여 평야를 둘렀고, 물은 청계로 내리어 큰 하수로 들어간다.” 하였다.
【산천】 관악산(冠岳山)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청계산(淸溪山) 현 동쪽 8리 지점에 있는데, 일명 청룡산(靑龍山)이다. 수리산(修理山)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노량진(露梁津)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한강(漢江)의 하류이다. 공수천(公需川) 현 남쪽 1리 되는 곳에 있다. 인덕원천(仁德院川) 현 남쪽 14리 지점에 있다. 학고개천(鶴古介川) 현 서쪽 19리 지점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다.
【역원】 양재역(良才驛)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에는 양재(楊梓)라고 일컬었는데,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본도를 찰방(察訪)한다. 예속된 역참이 열 둘인데, 낙생(樂生)ㆍ구흥(駒興)ㆍ금령(金嶺)ㆍ좌찬(佐贊)ㆍ분행(分行)ㆍ무극(無極)ㆍ강복(康福)ㆍ가천(加川)ㆍ청호(菁好)ㆍ장족(長足)ㆍ동화(同化)ㆍ해문(海門)이다.
○ 찰방은 1명인데, 종 6품(從六品)이며 다른 도(道)도 같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한 길 석양에 말에 맡겨 돌아가니, 가을 바람이 홀연히 일어나, 초 나라 사람이 슬프도다. 푸른 산과 푸른 물은 처량한 땅이요, 붉은 잎과 누른 꽃은 쓸쓸한 때로다. 시구(詩句)를 생각하니, 다만 머리 위의 따오기를 더하고, 형상을 잊었으니 어찌 꿈속의 삵을 기억하랴. 흰 구름이 시야에 들어오니, 돌아가는 흥이 흔들리네. 머리를 하늘 가에 돌리니 느끼는 생각이 배나 되네.” 하였다. 흑석참(黑石站)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좌도(左道) 수운판관(水運判官)에 속한다. 노량원(露梁院) 노량진 남쪽 언덕에 있다. 인덕원(仁德院)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미륵원(彌勒院) 현 북쪽 15리 저점에 있다. 오금원(吾金院)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불우】 청계사(淸溪寺) 청계산에 있는데, 이곡(李穀)이 지은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인규(趙仁規)의 사당기(祠堂記)가 있다.
○ 이색(李穡)의 시에, “청룡산(靑龍山) 밑 오래된 절 얼음과 눈에 끊어진 언덕이 들 계곡에 임하였도다. 단정히 남창(南窓)에 앉아 《주역(周易)》을 읽노라니, 종소리는 처음으로 움직이고 닭은 깃들이려 하네.” 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돌 길은 1천 언덕에 궁진하였고, 향 연기는 한 방이 맑도다. 손은 와서 차 끓이기를 구하고, 중은 앉아 스스로 불경을 뒤적이네. 나무는 늙었으니 어느 해에 심었으며, 종은 쇠잔하니 밤 중의 소리로다. 공(空)을 깨달아 인사가 끊어졌으니, 높이 누워서 생이 없는 것을 즐거워하네.” 하였다. 백화사(百華寺) 청계산에 있다.
○ 변계량의 시에, “절 방에 일찍이 속사(俗士) 오는 이가 없으니, 객중(客中)에 이것을 힘입어 오래 배회하네. 푸르고 푸른 묵은 잣나무는 창 앞에 곧게 서 있고, 희고 희게 갠 구름은 산 얼굴에 쌓였도다. 한 줌의 묘한 향기 사람의 참선 가운데 있고, 반(半) 처마 비낀 날에 학(鶴)이 날아 돌아오네. 살고 있는 중 본래 정회(情懷)가 게을러, 이끼가 쌍 사립에 껴도 낮에도 열지 않네.” 하였다. 관악사(冠岳寺) 관악산에 있다.
○ 변계량의 시에, “절 집을 한가히 찾으니 해질 무렵이로구나. 중중한 바위 사이로 이끼 낀 사립이 멀리 보이네. 길은 묵은 산벽(山壁)에 둘렀으니 공중을 서려 오르고, 등 덩굴은 새 가지에 길었으니, 자리에 들어와 늘어졌도다. 뜰 나무는 고요하게 외로운 학의 꿈을 흔들고, 병풍 같은 구름은 나직하게 참선하는 중 옷 떨치네. 10년의 형설(螢雪)이 마침내 무슨 일인가. 산이 좋아도 일찍이 한 수(首)의 시가 없네.” 하였다.
○ 성간(成侃)의 유북암기(遊北岩記)에, “여름 6월에 나는 관악사에 더위를 피하여, 날마다 중들과 같이 산의 깊은 숲과 기기한 돌을 모조리 구경하고, 이 산의 기절하고 이상한 것은 모두 나의 소유라 하였다. 하루는 중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산수를 싫도록 보았으나, 산의 북쪽을 연기가 가리켜 이상하게만 여기고, 실지로 구경하지 못하였는데, 왜 앞장서서 인도하지 않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산 북쪽은 숲이 더욱 깊고 돌이 더욱 높아, 길이 막혀서 끝까지 찾을 수 없네. 그러나 시험삼아 인도하리다.’ 하고 드디어 얽힌 덤불을 베고 먼저 서쪽 언덕에서 올라, 숲 사이로 행하여 들어가 꺾어져 북쪽으로 향하니 산 형세가 가파르게 솟았다. 더위잡고 기어오르다가 지치면, 손으로 칡덩굴을 붙잡고 쉬면서 가까스로 올라가니, 바위가 집 천장같이 되어 있고, 그 아래는 빙 둘려서 천 길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정신이 아찔하였다. 드디어 함께 두 다리를 뻗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조금 있다가 솔 바람 소리가 소슬하게 1만 구렁으로부터 불어오니, 무더운 더위는 머물지 못하였고, 아래에는 고기ㆍ새ㆍ풀ㆍ나무 따위 무성한 것과, 놀고 헤엄치는 것이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또 서쪽을 가리켜 바라보니, 큰 바다가 하늘에 닿아 구름과 안개가 희미하고 아득하며, 해가 바다에 들어가려 하니, 광선이 환하게 반사하여 붉은 것도 같고 푸른 것도 같으며 검은 것도 같고 흰 것도 같아서 형세가 기괴하였다. 아, 이 산에서 노닌 선비가 얼마며, 중은 얼마인데, 이 바위를 칭찬하여 말한 자가 없고, 다행히 나에게 스스로 드러나게 되었으니, 조물주가 나를 위하여 베풀어 놓은 것이 아닌가. 장주씨(莊周氏)의 말에, ‘큰 숲과 높은 산이 사람에게 좋은 것은 신(神)한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러나 장주(莊周)가 한 이 말은 반드시 잘 안 말이 못 된다. 대개 사람이 세상에 처하니, 밖으로는 만가지 일이 모이고 안으로는 백 가지 생각을 경영하여, 기운이 막히고 뜻이 통하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다가, 산림의 큼과 시내의 좋음을 본 뒤에 솟은 산이 눈과 꾀하고, 샘 소리가 귀와 꾀하면, 지난번 가슴속의 막히고 뭉클하여 퍼지지 못하던 것이 사라지고 풀리어 남은 것이 없게 된다. 옛날의 산수의 도움을 얻은 자가, 어찌 장주의 말을 족히 믿으랴.” 하였다.
관음사(觀音寺) 관악산에 있다.
○ 변계량의 시에, “관악산 남쪽, 청계산 북쪽에 절집이 우뚝하여 긴 숲을 눌렀네. 밤비에 고함 지르니 주린 호랑이가 부르짖는 듯하고, 해돋이에 조잘거리니 그윽한 새가 우는 듯하네. 구름이 창밑에서 나니 담장이 덩굴이 얽히고, 길이 돌 모퉁이로 도니 소나무 회(檜)나무가 우거졌도다. 멀리 생각하건대, 혜사(惠師)는 응당 잘 있을 것이고, 산 가운데서 밤마다 꿈에 서로 찾네.” 하였다. 송천사(松泉寺) 수리산(修理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서쪽 3리 지점에 있다. 여단(厲壇) 현의 북쪽에 있다.
【총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墓) 현 북쪽 동적리(同積里)에 있다.
유정현(柳廷顯)의 묘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정역(鄭易)의 묘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성석인(成石因)의 묘 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이승소(李承召)의 묘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열녀】본조 봉금(奉今) 일수(日守) 예명(芮命)의 아내이다. 그의 남편이 나쁜 병을 앓으니, 손가락을 잘라 먹이어 병이 나았다. 일이 조정에 들리자 문려(門閭)를 정표(旌表)하고 요역(徭役)을 면제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토산】 뱅어[白魚]ㆍ게[蟹]ㆍ밤[栗]ㆍ백토(白土)ㆍ 잉어[鯉魚].
【궁실】 행궁(行宮) 노량도(露梁渡) 남쪽 언덕에 있는데,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라 불렀으며, 나루 건너 행차할 때 여러 임금들이 멈추고 잠시 머물렀으므로 좌우에 배다리[舟橋]와 별장소(別將所)가 있었다.
【방면】 현내(縣內) 끝이 5리이다. 동면(東面)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남면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상서(上西)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하서(下西) 서남쪽으로 끝이 25리이다. 상북(上北) 끝이 20리이다. 하북(下北)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진도】 동작진(銅雀津) 북으로 18리인데, 나루[渡] 위에는 모노리탄(毛老里灘)과 기도(棋島)가 있다. 노량도(露梁渡) 북쪽으로 20리인데 전에는 흑석진(黑石津)이라 칭했다.
【사원】 민절서원(愍節書院) 숙종 신유년에 세웠고,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박팽년(朴彭年) 자는 인수(仁叟),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벼슬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성삼문(成三問)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벼슬은 승지(承旨)였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개(李塏) 자는 청보(淸甫), 호는 백옥(白玉)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벼슬은 직제학(直提學)이었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유성원(柳誠源) 자는 태초(太初), 본관은 문화(文化)인데, 벼슬은 사예(司藝)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하위지(河緯地) 자는 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벼슬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이었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유응부(兪應孚) 자는 신지(信之), 본관은 기계(杞溪), 벼슬은 총관(摠管)이었으며,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 이상 여섯 선비는 세조(世祖) 병자년에 화를 당하였는데, 숙종 때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노강서원(鷺江書院) 숙종 을해년에 세웠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박태보(朴泰輔) 파주 편에 붙였다.
○ 사충서원(四忠書院) 영조 을사년에 세웠고,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김창집(金昌集) 경도묘정(京都廟庭) 편에 보라. 이희명(李熙命) 자는 양숙(養叔), 호는 소재(疎齋),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벼슬은 좌의정,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조태채(趙泰采)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 본관은 양주(楊州), 벼슬은 우의정이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이건명(李健命) 자는 강중(剛仲), 호는 한포재(寒圃齋), 본관은 완산(完山)인데, 벼슬은 좌의정이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묘소 창빈묘(昌嬪墓) 상북면(上北面)에 있다. 중종(中宗)조 때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묘인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