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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송자대전 기록(송시열)

by 竹溪(죽계) 2006.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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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宋子大全) 제112권

 서(書)

남택하(南宅夏), 장시현(張始顯), 여필관(呂必寛)에게 답함 - 임자년(1672, 현종 13년, 선생 66세) 4월 4일



병으로 누워 있던 중 먼 곳에서 자네들의 혜찰(惠札)을 받았으니 이미 매우 감사한데 더구나 성 선생(成先生)의 일대(一大) 기이(奇異)한 일을 알려 줌에랴. 또 나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함께 사의(事宜)를 상량(商量)하자는 은혜를 받았으니 매우 경탄(驚歎)하여 침식(寢食)을 폐하기까지 하였네. 그러나 감히 받아들이지 못할 뜻이 있어 사정(私情)에 더욱 송구하고 부끄럽네.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이런 일은 오직 정직하고 청백(淸白)한 사람인 뒤에야 정신(精神)이 은연중 진실하여 조상의 영혼이 심신(心身)에 감응된다’ 하였으니, 아마도 여러분은 참으로 이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러나 만세(萬世)가 되어도 없어지지 않을 선생의 밝은 신령과 굳센 혼백이 아니라면 또 어떻게 수백 년이 지난 지금 후인(後人)들의 충심(衷心)을 끌어내어 장보(章甫)들이 읍양(揖讓)하는 사이에 밝게 나타날 수 있겠는가. 이른바, 엄리(嚴吏)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본관(本貫)이 영월(寧越)이 아닐는지. 노릉(魯陵 단종(端宗))이 죽던 날, 그 시신이 길가에 버려져 있었는데도 감히 거두는 자가 없었는데, 그때 군리(郡吏)로 있던 엄흥도(嚴興道)가 가서 보고는 관노(官奴)의 관(棺)을 가져다가 염습하여 장사를 지냈던 것일세. 전에 기묘 제현(己卯諸賢)들이 숭봉(崇奉)해야 한다고 건의했던 것이 바로 이 사람이었네.


그런데 지금 말한 그 엄리가 만약 그 사람의 자손이라면 어찌 더욱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가령 그의 자손이 아니라 하더라도, 엄씨로 인하여 그 임금의 버려진 시신이 염습되어 묻혀지게 되었고 엄씨로 인하여 그 신하가 유암(幽暗)한 처지에서 벗어나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닐세. 지난 무신년에 내가 엄흥도의 사적(事跡)을 주달하여 포록(褒錄)하기를 주청하고 이어 그 자손을 찾아보니 대체로 있기는 있었으나 참으로 그 자손인지가 매우 분명하지 않았으므로 항상 마음에 꺼림칙하였네. 그런데 지금 이 관리가 과연 그 자손이라면 그대로 녹용(錄用)하는 것이 시기상으로도 옳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별폭(別幅)을 외람되게 작은 종이에 써서 보내니, 만약 이치에 맞지 않는다면 아끼지 말고 인편에 회답하여 주기 바라네. 이도 역시 군자가 미열(迷劣)한 사람을 깨우치는 성심(盛心)이네. 시열(時烈)은 쇠로(衰老)하여 죽을 날이 가까운 데다가 큰 병까지 들었으니 죽을 길이 하나가 아닐세. 그런데도 두 해가 되도록 죽지 않고 있으니 매우 분수(分數)에 넘친 일인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머지는 병 때문에 이만 줄이네.


별지

하문(下問)한 9조(條) 중에서 그 1조에 말한 귀부(龜趺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의 결실(缺失)을 보수한다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인 듯하네. 2조와 3조에 말한 신주(神主)를 다시 분칠하고 다시 제서(題書)하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신주에 분(粉)을 바르는 것은 대개 후일에 씻어 내고 다시 제서하기 위해서인데 지금 이것은 영원토록 그 옛 모습대로 보존해서 백세(百世) 뒤에도 그 당초의 진적(眞蹟)을 알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니 옛 글씨 획을 그대로 둔 채 거기에 다시 점화(點化)만을 더하여 분명해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구양공(歐陽公)은 왕철창(王鐵鎗)의 진족(眞簇)을 검게 더럽혀진 채로 놓아두고 말하기를,


“그 참모습을 상실할까 두렵다.”

고 하였으니, 선현(先賢)들이 옛것을 변경하는 데 있어서 신중하였던 것이 이와 같네.

그 4조에 말한 신주를 다시 모셔 낼 때에는 많은 선비들이 모여서 주과(酒果)와 제문(祭文)을 갖추어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인정(人情)과 예문(禮文)에 합당한 일이니, 자네들의 고명한 견해와 통달한 지식에 더욱 경탄하는 바일세.


그 5조와 6조에 말한 장주(章奏)를 올려 사우(祠宇)의 건립을 청했다가 윤허하지 않으면 개인적으로 세우겠다는 것은 그 진정(陳情)과 청원이 어찌 정당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그 당시 만세에 빛날 충신이라는 성상(聖上)의 말씀이 있었고 명조(明朝)에서도 방우(方于) 두 신하를 숭봉(崇奉)하는 것을 허락했었으니, 이 일은 다시 의심할 것이 없네. 그러나 동춘(同春)께서 일찍이 이 일을 건의했다가 저지당하였고 저지당한 뒤에는 사사로이 건립하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는 바라고 하였으니, 나의 생각에는 하 선생(河先生)의 예에 따라 청하지 말고 홍주(洪州) 노은동(老隱洞)에 있는 선생의 구기(舊基)에 사당을 세우는 것이 좋을 듯하네. 그리고 위패(位牌)와 조두(俎豆)를 설치하고 신주(神主)를 위패 뒤에 모셔 대략 신주 뒤에 혼백(魂帛)을 모셔 두는 것같이 한다면 혹 허물이 적을 것일세. 하 선생의 사당은 선산(善山)에 있는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쓴 표장(表章)의 문자(文字)가 간행되어 세상에 나돌고 있으니, 지금의 청풍 부사(淸風府使)에게 구하면 그 인본(印本)을 얻을 수 있을 것일세.


또 한 가지 일이 있으니, 노은동(老隱洞)에 있는 선생의 구택(舊宅)이 지금까지 허물어지지 않았고 그 정원에 늙은 오동나무가 있는데, 바로 선생의 등제(登第)를 경하하는 잔치를 베풀 때 북을 달았던 나무라고 하네. 지금 서백(西伯)이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있을 때에 비(碑)를 세워 표장(表章)하려고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는데 비문이 완성되자 서백이 체임(遞任)되어 돌아왔기 때문에 중지되고 말았네. 만약 사우(祠宇)를 세우는 일이 옳지 않다고 여겨진다면 하 선생의 예와 같이 신주(神主)를 이 집에 봉안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회덕(懷德)에 박 선생(朴先生 박팽년(朴彭年)을 말함)의 유허(遺墟)가 있으므로 동춘(同春)이 사당의 건립을 주청했다가 금절(禁切)을 당하고서는 굳이 사당을 세우는 것은 의리상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비석만 세우고 비각을 지어 보호하였을 뿐이었네. 비각을 세우고서는 지패(紙牌 지방(紙榜))를 만들어 봄과 가을로 그 안에서 제사를 올리고는 곧바로 지패를 불사르려고 하였네. 지금 선산(善山)의 예(例)와 같이 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회덕의 예에 따라 한다면 신주(神主)로 모시는 것이 지패에 비할 것이 아니고 구옥(舊屋)은 더욱 혼(魂)이 돌아오기에 마땅한 곳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전요(典要)일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섯 분의 선생을 함께 제향하는 것도 매우 의의있는 일이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감창(感愴)하게 하네. 일찍이 듣건대, 박 선생의 자손이 선생에게 향사(享祀)를 올리고 꿈을 꾸니 다섯 사람이 함께 흠향하고 있으므로 그 뒤로는 반드시 다섯 분의 위패를 함께 배설(配設)하고 제사를 올린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믿기는 어려우나 아마도 이런 이치가 있을 듯하네. 그렇다면 7조와 8조에 말한 외손[外裔] 운운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네. 외손이 향리(鄕里)의 제생들과 함께 수리하고 지키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그러나 매안(埋安)에 대한 설(說)은 마음속으로 차마 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로 차마 하지 못할 바이니, 혹시 이런 의논을 하는 자가 있을 지라도 자네들은 끝내 듣지 않을 줄로 생각하네.


그리고 노량진(露梁津)에 있는 제위의 분묘(墳墓)는 우선 전의(傳疑)의 뜻으로 재단하는 것이 옳을 듯하네. 혹 매안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여기에 매안해서야 되겠는가. 말이 난 김에 자네들에게 청이 있네. 노량진에 있는 분묘는 진실로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려우나 십중팔구는 진실일걸세. 듣건대 지난번 조정에서 참절(僭竊)한 묘석(墓石)을 철거하다가 그중 한 분묘의 표석(表石)을 잘못하여 부수었다고 하니 이는 매우 놀랍고 해괴한 일일세. 그러니 자네들이 다시 세우기를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9조에 말한 박 참찬(朴參贊)의 신주(神主)는 전에 박씨(朴氏) 성(姓)을 가진 사람의 행장(行狀)으로 인하여 그 선대가 실로 선생의 외손임을 알았네. 그러므로 어제 이미 인편에 글을 보내어 알렸으니, 그 사람이 반드시 처리하는 바가 있을 것일세.


생각건대 선생의 신주가 발견되었다는 것을 아뢴 뒤에 즉시 다시 땅속에 묻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참으로 미안한 바일세. 그러니 모름지기 빨리 홍주(洪州)의 옛집에 봉안하고 논의(論議)를 기다려서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산(尼山) 사람에게 맡겨 받들어 가게 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네.




[주D-001]성 선생(成先生)의 …… 일 : 현종(顯宗) 13년 4월에 호조 서리(戶曹書吏) 엄의룡(嚴義龍)이 인왕산(仁王山)의 무너진 돌더미 사이에서 성삼문(成三問)과 그의 외손(外孫) 박호(朴壕) 부부의 신주(神主)를 발견한 일이다. 《宋子大全 卷142 洪州魯恩洞遷奉成先生神主記》

[주D-002]고인(古人)이 …… 감응된다 : 고인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을 말하는데, 사람이 죽으면 그 여기(餘氣)가 자손의 신상에 분산되어 있으므로 자손의 몸에 이상이 있으면 신명(神明)에게 감응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정직하고 청백한 뒤에야 조상의 혼령이 감응한다는 뜻으로 《추강집(秋江集》 냉화(冷話)에 보인다. 《宋子大全隨箚 卷10》

[주D-003]엄리(嚴吏) : 성삼문의 신주를 발견한 이조 서리(吏曹書吏) 엄의룡(嚴義龍)을 말한다.

[주D-004]엄흥도(嚴興道) : 단종(端宗)의 시신을 거둔 영월(寧越)의 호장(戶長)이다.

[주D-005]기묘 제현(己卯諸賢) : 중종(中宗) 14년 기묘년(1519)에 홍경주(洪景舟)ㆍ남곤(南袞)ㆍ심정(沈貞) 등의 무함(誣陷)으로 주륙(誅戮)을 당한 조광조(趙光祖) 등의 유현(儒賢)을 말한다. 이때의 참화(慘禍)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한다.

[주D-006]그 신하 : 성삼문(成三問)을 말한다.

[주D-007]무신년 : 현종(顯宗) 9년(1668)인데 송자연보(宋子年譜)에 의하면 엄흥도(嚴興道)의 포록(褒錄)을 주청한 것은 무신년이 아니라 다음해인 기유년으로 되어 있다.

[주D-008]점화(點化) : 종래의 것을 손질하여 새롭게 한다.

[주D-009]왕철창(王鐵鎗) : 후량(後梁) 때 왕언장(王彥章)을 가리킨다. 철창(鐵鎗)은 그의 호이다. 그가 행영(行營)의 선봉(先鋒)이 되어 철창을 사용하는 것이 몹시 빨랐으므로 군중(軍中)에서 왕철창(王鐵鎗)이라고 하였다. 《宋子大全隨箚 卷10》

[주D-010]방우(方于) : 방은 명 혜제(明惠帝) 때의 충신(忠臣) 방효유(方孝儒)이고, 우(于)는 명 영종(明英宗) 때의 명신(名臣) 우겸(于謙)을 말한다. 방효유는 혜제 때의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건문(建文) 4년(1402)에 문황(文皇 연왕(燕王) 주체(朱棣))이 경사(京師)에 들어와 혜제를 몰아내자 참최복(斬衰服)을 입고 궐하(闕下)에서 통곡하였다. 그리고 문황이 불러도 응하지 않고 즉위의 조서(詔書)를 기초(起草)하게 하자 붓을 던지고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다가 멸족(滅族)의 화(禍)를 입었다. 우겸은, 정통(正統) 14년(1449)에 영종이 오랑캐 야선(也先)에게 패하여 북쪽으로 잡혀가자 성왕(成王 경제(景帝))을 황제로 추대하고 국력을 길러 야선의 침략을 물리쳤다. 그 뒤 영종이 포로에서 풀려 본국으로 돌아와 복위하자, 경제를 추대한 죄로 멸족의 화를 입었다. 《明史 卷141 方孝儒傳, 卷172 于謙傳》

[주D-011]서백(西伯) : 바로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을 말한다.

[주D-012]다섯 분의 선생 : 사육신(死六臣) 중에 성삼문(成三問)을 제외한 이개(李愷)ㆍ하위지(河緯池)ㆍ박팽년(朴彭年)ㆍ유응부(兪應孚)ㆍ유성원(柳誠源)을 말한다.

[주D-013]매안(埋安) : 친진(親盡)한 신주(神主)를 산소(山所)에 묻는 일이다. 여기서는 성삼문의 신주를 매안하는 일이다.

[주D-014]전의(傳疑) : 의문(疑問)을 단정하지 않고 의문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주D-015]조정(朝廷)에서 …… 철거하다가 : 숙종(肅宗) 3년 정사년(1677)에 윤휴(尹鑴)의 건의(建議)로 중인(中人)과 서인(庶人)들의 참람한 묘석(墓石)들을 철훼(撤毁)하도록 하였다. 《宋子大全隨箚 卷10》

[주D-016]박 참찬(朴參贊)의 신주(神主) : 이조 서리(吏曹書吏) 엄의룡(嚴義龍)에 의해 인왕산 돌더미 사이에서 성삼문(成三問)의 신주와 함께 발견된 박호(朴壕)의 신주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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