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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은 민중언어의 詩이다.
전라도 지방에 가면 이런 말이 있었다. "순천에 가서 인물자랑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돈자랑하지 말고, 벌교에 가서 주먹자랑하지 말고, 진도에 가서 노래 자랑하지 말고, 순창 가서 욕자랑 마라." 이 말은 후백제의 멸망 이후, 소외되고 차별받은 호남 민중들의 삶을 고스란히 반영한 말이다. 한국어는 전 세계 그 어느 언어보다 욕이 발달했다. 그 중에서도 전라도 사투리의 욕은 다른 지방의 욕과는 색다르게 감칠맛 나고, 풍부한 어휘를 지니고 있다. 수천 년의 소외와 수탈의 역사가 만들어낸 아픈 상처인 것이다. 흔히 "전라도 시인"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우리 문학의 파수꾼들 역시, 그 욕 안에 담긴 해학과 눈물과 저항을 몸으로 익히고, 또 그것을 시대의 먹물에 풀어 썼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호남 출신 문인들이 월등하게 많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왜 호남인가? 구구절절히 말하지 않아도 잘들 아실 것이라 믿는다. 농토는 넓으나 제 것이 아니고, 인물은 많았으나 '역적'이나 '폭도'의 이름으로만 남았던 곳이 호남이기 때문이다. 가슴 속 깊히 한의 정서와 저항의 노래가 자리할 수 밖에 없었다. 멀게는 견훤에서부터 가깝게는 광주민중항쟁까지, 호남은 분명 한반도 안에 있었으되, 동시에 그 경계 바깥에서는 불온한 반역의 상징이 되었었다. <국민의 정부> 출범 후에도 그 땅을 바라보는 시선은 별반 바뀌지 않았다. TV에서 전라도 사투리는 여전히 깡패와 도둑과 사기꾼들의 "천박한" 언어로 나타났고, 그와는 반대로 경상도 사투리는 지배층의 "구수한" 고향어로 강조되었다. 호남 출신이 출세하여 주류세력으로 편입된 경우를 형상화 할 때는, 반드시 "표준어"를 쓰는 "교양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반면에 영남 출신의 주류들을 드라마나 영화로 나타낼 때는 경상도 사투리를 고치지 않은 채 쓰고 있다. 우리 가슴 속에 자리한 "영남패권주의"와 5000년 지배담론의 그림자는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하여, 영화 《황산벌》에서 계백과 "거시기"의 대사는 여전히 아프게 한국현대사를 후벼파고 있다. 수구파쇼매체 《주간조선》의 편집장 조갑제의 무식하기 짝이 없는 시비걸기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대목이다. 문화적 숭고주의와 언어적 엄숙주의를 고집하는 자들은 말한다. "욕이 한국어를 파괴하고 있다."고. 그러나 정작 한국어의 다양한 표현력과 민중성을 파괴하는 것은 그들의 "언어독점주의"이다. 자신들의 언어만을 강요하고, 저항의 언어를 말살하며, 지역패권주의를 합리화시키고, "표준말"이라는 용어 아래 아픈 역사의 상징어들을 탄압하는 지배담론의 옹호자들의 언어독점이야말로, 이 땅의 "먹물"들이 격파해야 할 또다른 문화적 독재이다. TV에서 "개새끼", "씨발년" 따위의 욕이 나올 때마다 "한국어의 순수성"을 들먹이며 흥분하는 전여옥 류의 궤변은 그러므로 그 어떤 정당성도 가지지 못한다. 민중들의 슬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려 하지 않는 자들이 끄적이는 시와 소설과 잡문이 그 어떤 감동을 주겠는가. 그것은 단지 자신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려는 배부른 자들의 음풍농월일 뿐, 결코 진정한 "한(恨)의 풀어쓰기"가 될 수 없다. 굳이 욕이 가지는 문학적 코드를 말하지 않아도, 욕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이 선택한 최후의 저항수단이다. 그것의 생명력을 우습게 아는 자들은 그러므로 진정한 글쟁이가 될 수 없다. 죽을 때까지 "별과 꽃과 이슬"만을 노래해 보라.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호칭에 감격해 하며 끊임없이 지배담론과 근친상간해 보라. 그 작품들은 당대의 시간대조차 넘기지 못할 것이다. <열린 사랑>을 노래하는 도종환의 詩와 <닫힌 사랑>을 주절거린 서정윤의 詩 중 어느 것이 더 오래 기억되는가. 민중들의 눈동자에 깊이 남아있는 삶의 언어와, 배부른 자들의 아랫도리를 적시는 정욕의 언어 중에 어느 것이 더 영혼을 뒤흔드는가. 욕을 욕하는 자들의 말장난은 Sex Broadcasting System 하나로 족하다. 욕은 민중언어의 시이다. 때론 찢어진 상처의 모습으로, 때로는 걸쭉한 막걸리의 텁텁함으로, 또 때로는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청량음료의 내용으로 오는 우리 모두의 시이다. 재건 데이트는 겹사꾸라와
함께. 5.16 쿠테타는 유행어를 새롭게 만들어 냈다. 제일 먼저 바람을 일으킨 것은 "세대교체"와 "재건"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건국민운동>, <국가경제재건운동>에서처럼 단체 이름이나 구호에서 "재건"이라는 말은 빠지지 않고 사용되었다. "재건합시다."라는 인사말이 나오는가 하면, 새로운 옷을 만들어 "재건복"이라고 하였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돈을 안들이고 걸어다니는 "재건 데이트"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재건" 속에 뒤섞여 "무허가 건축"도 유행하였다. 그 말은 <못생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당시 판자집 류의 무허가 건축이 즐비한데서 유래한다. 요즘 말로 옮기면 "얼꽝(얼짱의 반대말)"이 될 것이다. "세대교체"라는 말은, 1963년 2월 27일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당시 <정국 수습을 위한 선서식>에서 "세대교체의 노력이 대다수 정치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라고 발언한데서 비롯하였다. 그 말은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공격의 용어로 쓰였다. 이후 "세대교체"는 "때묻은 사람 물러가라!"는 구호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곧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혁명주체", "차트 행정(탁상 공론)", "브리핑", "캠페인" 등의 말도 유행하였다. "번의", "소신", "민족적 민주주의", "자주성"도 당시 박정희의 작품이다. "부재"라는 말도 이 무렵에 많은 새끼말을 만들면서 퍼졌다. "언론부재", "교육부재", "공약부재", "정치부재", "대화부재"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부인은 부재중"이라는 말까지 낳아, "요정"에서 "수청을 들어달라."는 암시어로 사용되었다. 공화당의 2인자 김종필 역시 잊을 수 없는 유행어를 창조하였다. 1963년 2월 25일, 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장을 사임하고 순회대사 자격으로 외국행 길에 오르기 직전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종필은 "자의반 타의반이 여행동기"라고 하여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유행어를 창조하였다. 그래서 당시 화장실에 가는 여학생들은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말하였다. 1963년의 최대 유행어는 "나는 당신의 정신적 남편"이다. 1963년 10월 15일, 제 5대 대통령 선거에서 15만표 차로 박정희에게 패배한 윤보선이, 한달 뒤 진해의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에서 "나는 국민의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발언하였다. 이 말로부터 "정신적 ~"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구걸하는 이들도 유행에 민감했다. 거지들은 동냥을 잘 안주고 문전박대하는 가정주부들에게 "나는 당신의 정신적 남편"이라고 놀려댔다. 1960년대에는 자신의 정체를 위장하여 반대파와 내통하는 자를 가리켜 "사꾸라(벚꽃)"라고 하였다. 이 말의 유래는 1963년 어떤 날, 당시 야당의 거물이던 유진산을 향해 누군가 공개석상에서 "사꾸라"라고 고함쳤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 뒤 크게 유행하여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는 말과 함께 "겹사꾸라", "왕사꾸라" 등의 말을 낳으며 사용되었다. 또 1964년에는 공화당 의장 이효상이, "나라가 잘되려면, 여당에는 야당 사꾸라가, 야당에는 여당 사꾸라가 있어야 한다."는 공화당식 희망사항을 발설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 말은 정치하는 불쌍한 중생들이, 서로 비방하면서 80년대까지 줄기차게 살아남는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였다. 1963년 제 6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고 나서는 <전국구 비례대표 의원>을 가리켜 "비료(肥料)대표"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이는 선거자금이 궁했던 당시 야당에서 정치헌금을 받고 전국구 후보 순위를 팔았기 때문이다. "비료대표"는 당시 돈으로 5천만 원까지 호가하였으며, 갖가지 추문을 뿌려 매관매직의 대명사가 되었다. 1964년엔 동경에서 올림픽이 있었다. 그 때 남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 신금단 부녀가 극적으로 상봉하고 난 뒤 다시 헤어지는 장면에서, 신금단이 "아바이"라고 울부짖어 그 말이 곧 유행하였다.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같은 해, <대일 굴욕 외교 반대 시위>가 치열해지면서 <재경 교수단>이 대일굴욕외교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하자, 당시 문교부장관이 이들을 "정치교수"라고 비난했다. 이 시위의 여파로 "정치학생(굴욕외교를 반대하는 대학생)"이 생겨났고, "정치방학(대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한 임시 방학)"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는 과거사에 대한 그 어떤 사죄나 보상도 없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였다. 과거사 문제의 시작이었다. 당시 일본과의 교섭을 맡고 있던 김종필은 회담과장에서 독도문제가 불거지자 "독도를 폭파하자."는 말을 하여, 민족반역자로서의 위상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경제개발 지원금을 향한 한국정부의 굴욕적인 말과 행동에서, "고자세(일본측)", "저자세(한국측)"이라는 말이 파생하였다. 1967년 제 7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에는 "선심공세", "타락 선거"라는 말과 함께, "막걸리 선거", "장국밥 선거", "개판 선거"라는 말이 유행하였고, 친 박정희 세력의 폭력이 판을 치던, 당시 대학가 학생회장 선거는 "코피 선거"로 불렸다. 1969년 3월에는 "가짜박사" 소동이 일어나 현직장관, 고위관료, 국회의원, 대학총장, 목사 등 유명인사 40여 명이 들통났는데, 이 바람에 "가짜 대학생", "가짜 의사", "가짜 롤렉스 시계" 등 "가짜"들이 주류세력의 실체임이 드러났다. 1960년대 말에는 정치인들이 고위층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것과 관련하여, 항간에 누가 얼마 받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 불법 음성거래로 이루어진 돈을 "오리발"이라고 하여, 정치권에서 크고 작은 부정부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오리발"이 나왔다. 1960년대 후반부에는 <우주시대 개막>, <연예계 시대의 시작>과 관련해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유행어가 창조되었다. 1966년 3월 <제미니 8호>가 도킹에 성공하고, 6월에 <제미니 9호>가 랑데부와 우주유영에 성공하자, 즉각 "우주 시대의 이성교제는 <랑데부>에서 <도킹>으로!"라는 말이 나왔다. 1969년 7월 21일에는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에 성공함으로써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우주에 "오염된 발자국"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부터 양복점, 술집, 다방, 음식점 이름에 "아폴로"라는 이름이 대거 등장하였다. 첨단 "탈 것"을 비꼬는 "11호 자가용(걷기)"도 이때 발명되었다. 미국이 달표면에 "성조기"를 꽂을 때, 한국의 여성들은 학교와 공장의 기숙사 창가에 "빤스"를 꽂았고, 많은 남성들이 이를 "청춘의 깃발"이라 하여 훔쳐 보거나 훔쳤다. 이듬해인 1970년에는 "인공위성이 발사되고 궤도 수정을 하였다."라는 말이 유행하였는데, 이는 <애인 바꾸기>를 생활화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한 것이었다. "테레비"와 "나지오"의 보급이 늘어남에 따라 연예인의 시대가 차츰 열리기 시작하면서, 연예인들이 유행어의 창조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좋아하네."와 "웃겼어."라는 말은 그것들 가운데 한 예이다. 한국 코미디의 영원한 대부 서영춘의 "출세해서 남 주나?", "놀랐지?", "가갈갈갈"은 1965년에 탄생한 말이다. 현재 한국 코미디계의 큰 어른인 구봉서가 창작한 "몰랐지? 몰랐을 거다."는 엉뚱한 일을 해 놓고 뒤에서 약올리는 데 쓰였다. 가수 윤복희는 국내에 처음으로 무릎 위까지 올라가는 "미니 스커트"를 상륙시켰고, 신문과 잡지의 해외토픽란에는 미니스커트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미니"라는 말이 득세하였다. "미니"의 열풍은 "미니 아가씨", "미니 만년필", "미니 콘사이스(사전)", "미니 강의" 등으로 출발해서 "초미니"에 이르렀다. "미니 스커트"는 "따오기"라는 순우리말로 바뀌어지기도 했는데, 이는 <보일 듯이 보일 듯이 / 보이지 않는 / 따옥 따옥 따옥 소리 / 처량한 소리>의 동요 <따오기>에서 따온 말이다. "누구 왕년에"도 1960년대의 최고 히트 작품 중의 하나이다. "누구 왕년에 데이트 안 해본 사람 있나.", "누구 왕년에 요정 한두 번 안 가본 사람 있나."하는 식으로 응용되어 널리 퍼졌다. 또 "이거 되겠습니까?"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말은 구봉서가 <동아방송(TBC)>에서 자주 말한 데서 비롯하였다. "종삼(鐘三-종로 3가)", "꼰대(아버지)", "새발의 피", "롱가리트(화학성분)", "자수해서 광명 찾어.", "민생고 해결", "공부해서 남 주나?", "말짱 헛거야.", "소비는 미덕이다(김종필).", "아더메치유(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유치함)", "베트콩(서울 무교동 일대의 사창가에서 옮은 국제 성병)", "불쾌지수", "시행착오", "마이카 족" 등도 유행하였다. 농촌에서는 정부의 농촌시책을 빗댄 "추경(秋耕)", "소주밀식(小株密植-소수의 품종을 빽빽하게 심음)"이 대유행이었다. "도둑놈촌(고위관료들의 동네)", "강도촌(졸부들의 동네)" 등도 대도시 곳곳에 있었다. 농촌을 죽이고 압축성장을 강조하는, "개발 독재"의 시작이었다. 나 평양 갔다가, 객고 풀러 왔어. 1970년대는, 시인 김지하의 『오적(五賊)』 사건으로 시작하였다. "도둑놈촌"과 "강도촌"에 사는 자들을 일러 "오적"이라 한 것이다. 거기에다 1970년 3월 17일 발생한 "정인숙 사건"도, 많은 유행어를 생산하였다. 그 첫째가 "명함 조심"이다. 정인숙의 핸드백에서 수많은 정치인들의 명함이 쏟아져 나와 생긴 말이다. 그녀가 친오빠의 손에 강변로에서 살해되었다고 하여, "오빠 조심"도 유행하였으며, 정조 관념이 희박한 여자를 가리켜 "강변 3로"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또 정인숙이 죽기 전, 타워호텔과 스카이 라운지에서 <잉글버트 험퍼딩크(Engelbert Humperdinck)>의 노래 「Release Me」를 여러 차례 청해 들었다고 해서, 그 노래가 "인숙이의 노래"로 통했다. 이 사건은 후일 정일권으로 대표되는 당대의 세도가들이 공모한 살인 사건으로 밝혀졌으나,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은 아직 <친동생을 죽인 자>라는 누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1970년 국방부는 <해외유학생 병역 기피>를 단속하느라고 미입국자와 친권자 명단을 공개했다. 그래서 상대방의 약점을 폭로할 때는 흔히 "명단 공개"가 뒤따랐다. 1971년에는 유명인사들의 이민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명사이민"이니 "도피이민"이니 하는 말들이 퍼졌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이민열풍"의 원조인 셈이다. 또 "사법파동"은 "객고(客苦)푼다."는 말을 유행시켰다. 신민당 의원 유갑종이 국회에서 "사법파동"을 따지며 발언하기를, "출장가서 객고 안 풀어본 사람이 있느냐."고 말하여, 여성단체의 성토를 받았지만, 그로 인해서 "객고푼다."는 말은 오히려 더 유행하였다. 일전에 한나라당 국회의원 이경재가 유행시킨 "주물럭" 발언의 1970년대 판이었다. 이 말은 출장가는 남편에게 "객고풀지 말라."는 경고로 주부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다. 판사에 대한 구속영장에서 객고푼 "꽃값(화대)"의 명세서까지 추가되어 "꽃값"이라는 말도 덩달아 유명세를 탔다. 이 해에는 억대 호화판 포커단이 적발되었는데, 교포 사업가, 은행 간부, 기업체 사장, 여대생 등이 어울린 이 포커단은 "핸디 조정실"이라는 방을 만들고 놀았다 해서, 각종 "주부도박단"과 전문 "타짜"들 사이에서 "핸디 조정실" 바람이 일었다. 1971년 10월 15일에는, 유신체제의 미친 바람 속에 "위수령"이 선포되었다. 10인 이상의 집회는 반드시 허가를 받도록 하였는데, 대학생들은 몇몇이 얘기하다 다른 친구가 끼어들면 "학장 허가 받아와."라고 말함으로써 이를 비웃었다. 그 해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40대 기수론"의 후보,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은 총통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여, 이후 계속되는 목숨을 건 정치투쟁을 암시하였다. 이 때 TBC 텔레비전 《마부》에서는 탤런트 여운계가 "잘하는 짓이야."하였고, 가수 하춘화는 노래 《잘했군, 잘했어》에서 "잘했군 잘했어."하였다. 1972년 1월 14일 새벽 2시, 영화배우 방성자의 집 1층에서 한 도둑이 45구경 권총 1발을 맞아 복부관통상을 입었다. 애초에는 방성자 자신이 쏜 것으로 발표되었으나, 수사결과 진범은 그녀의 애인 함기준인 것으로 밝혀졌다. 방성자는 기자회견에서 "한 여자로 부탁하겠다."고 전제한 뒤, "이 사건을 아름답게 보아주느냐, 추하게 보아주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자 여러분들의 양식에 달렸다."고 말하여, 그때부터 "아름답게 봐주세요."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좋아하시네.", "웃기지마.", "까불지마.", "공갈치지마."가 나왔다.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던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평양에 갔다 왔다."하여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미 각조 유행어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 말을 재생산하여, 유행시켰다. 상대방을 놀라게 해줄 때는 "실은 나, 평양 갔다 왔어."하고 말문을 연 것이다. 남북공동성명 발표로 유행한 말은 또 있다. "대화 없는 대결에서 대화 있는 대결로!"였다. 남북관계의 표면적 변화를 비꼬는 말이었다. 유행어는 계속 만들어졌다. 일본인들의 퇴폐관광과 거기에 빌붙어 사는 자들에게서 나온 "기생관광"이나, 매미를 보지 못한 서울 지역 초등학생이 30%가 넘는다고 하여 생겨난 "매미교육" 등이다. 1972년 반민주적이고 반역사적인 "유신헌법"이 등장하고부터 "유신"이라는 말이 시대적 화두로 등장하였다. "유신행정", "유신체제", "유신국회", "유신내각", "유신시대" 등등 그 종류는 많았다. 이 말은 국민들을 폭력으로 억압하고, 종신독재의 단꿈을 꾸는 자들에게는 "장미빛 미래"를 상징하는 말이었고, 그것에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겨울공화국"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1973년에는 <윤필용 사건>으로 군부가 요동쳤다. "하나회"의 후원자 윤필용 장군이 이후락과의 술자리에서 했던 <박정희 후계 발언(박정희는 "국부"로 물러나고 이후락이 그 뒤를 이어야 한다)>이 박정희의 귀에 들어가, 군부에서 윤필용과 <하나회>의 "잔챙이" 44명과 중앙정보부에서 "울산 사단(이후락 직계)" 30여 명이 구속되거나 쫒겨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시 수사를 지휘하던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강창성 장군 때문에 경상도 장군의 씨가 마른다."는 "영남 군벌"들의 비난이 쏟아지면서 끝났다. 당시 "하나회" 핵심이던 전두환과 노태우 등은 오히려 승진을 거듭했고, 강창성은 5공 정권 때 이루 말 할 수 없는 수모를 당했다. "영남 군벌"에 의지하던 박정희는 그 군벌세력을 자를 수 없었던 것이다. 1974년 4월 13일 아침 8시 15분, 22살 가량의 청년이 안암동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스트리킹"을 시도했다. 이 사건은 "나체질주", "벌거벗은 진실"이라는 다소 철학적인 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1974년에는 뭐니뭐니해도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가 크게 유행하였다. 7월 4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벌어진 프로권투 WBA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도전자 홍수환이 챔치언 아놀드 테일러에게 "심판 전원일치"의 판정승을 거두었다. "고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이 승전보가 중계될 때, 홍수환과 그의 어머니가 전화로 연결되어 감격을 서로 전하면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수환아. 대한민국 만세다."라고 한 것이다. 홍수환은 3년 뒤, 다시 파나마에서 카라스키야에게 네 번 다운되고도 끝내 KO시킴으로써, "사전오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1975년에는 정부에서 이른바 "급행료" 전폐를 부르짖었다. 그리하여 "기름칠한다.", "손을 쓴다."는 말로 통용되던 뇌물을 "급행료"라는 말이 대체하였다. 이 말은 다시 "황금의 묘약", "윤활유"라는 말로 탈바꿈하였다. 교육현장에서는 교사들이 <학부모에게 촌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결백확인서" 받기 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결백증(證)"이라는 말이 유행하였지만, 누워서 침뱉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무렵에는 "자기"라는 말도 크게 유행하였다. 만화가 고우영 선생의 《수호지》에서 반금련이 내연의 남자 서문경에게 "자기 멋쟁이!"라고 하여, "자기" 바람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애인 사이에 스스럼 없이 쓰던 "지까짓 것"이라는 호칭이 있었는데, 이 말은 곧 "자기"로 대체되었다. 또 "방위세"가 신설되어 "사치세", "소비세", "낚시세", "태공세(太公稅)"라는 말이 생겨났고, 직장에서 습관적으로 일찍 퇴근하는 사람에게는 "퇴근세"를 내라고 하였다. 1975년 <하나님의 자녀>라는 기독교 교파가 상륙하여 "섹스교", "구멍교"라는 유행어를 남겼고, <박동명 사건>으로 "명단녀(名單女)", "칠공자"라는 말이 생겨났다. 베트남전이 끝나가면서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들이 여기 저기에서 날품팔이와 잡상인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시내버스에서는 "본인은 월남에서 한 다리를 잃고 ~"로 시작되는 피맺힌 호소를 하는 "파월용사"들이 늘어갔지만, 그들에게 "자유의 십자군"이라는 호사스러운 명칭을 부여한 박정희 정권은 그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에이전트 오렌지"에 의해 대를 이어 가는 피해를 입은 "고엽제 피해자"들의 절박한 요구 앞에는,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경찰봉이 춤출 뿐이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974년 <긴급조치 시대>가 도래하면서, "정찰제 판결"이 성행하였다. 1975년 1월 15일, <개헌 청원 서명운동>을 주도하던 장준하와 백기완이 <긴급조치 1호>의 첫 위반자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의 재판은 혐의사실도 간단했고, 재판도 속결주의였으며, 검찰의 기소장도 짤막하였고, 변론 또한 간단하였다. 두 사람은 구속 10일 뒤인 1975년 1월 25일, <비상고등군법회의>에 기소되어 1월 31일에 첫공판이 열렸고, 다음날 실형의 선고가 있었다. 검찰의 구형과 똑같은 15년 형이었다. 이때부터 긴급조치가 해제될 때까지 "정찰제 판결"이 계속되었다. 스스로를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는, 우리 사법부의 지울 수 없는 치부였다. 1975년 4월 11일에는 서울대 농대생이던 김상진이 교내에서 할복 자결하였다. 그는 <양심선언문>에서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이라 하였다. 70년대 그 많은 시국선언문의 모범이자, "우골탑(牛骨塔)"에 갇힌 양심들에게 "학우여"라는 커다란 울림을 남긴 민주열사였다. 1976년은 연예인들의 말이 유행어로 많이 나왔다. 송대관의 《해뜰날》에서 "쨍", 강부자의 "나 좀 봐야 해.", 김순철의 "바쁘다 바뻐.", 한진희의 "죽갔네.", 임희춘의 "아이구야." 등이 그것이다. 특히 "바쁘다 바뻐."는 일본 NHK에서 《"바쁘다" 특집》을 제작할 정도였다. <황금만능주의>를 "돈스럽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살벌한 현실 속에서도 연애는 하고 살아야 했는지, 대학생들은 "레파토리는 많은데, 히트송이 없다."고 하였다. 이성친구는 많지만, 진짜 애인이 없다는 뜻이었다. 1978년에는 "~ 불출(不出)"이 유행하였다. ① 세계사격대회 기념주화를 가졌는가 못가졌는가, ② 아파트 특혜분양을 받았는가 못받았는가, ③ 세종문화회관 관람권을 받았는가 못받았는가, ④ 중동여행을 했는가 못했는가, ⑤ 화력시범에 초청되었는가 안되었는가 하는 것이 그 기준이었다. 즉, 한가지도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5불출", 두 가지에 해당하는 사람은 "3불출"하는 식이었다. 하루하루가 삶의 전쟁터인 서민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졸부들과 고위층만의 말장난이었다. 연이어 실패한 아파트 정책으로 "갈팡트", 시멘트 품귀로 "금멘트", 고추값이 폭등하여 "금치" 따위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 상류층 혹은 "사회지도층 인사"라는 자들이 "불출놀이"나 하고 있었으니, 나라 꼴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디스코", "끝내준다.", "열받는다.", "꽃띠(나이 어린 호스테스)", "가발데이트(중년 남성의 불륜)" 등은 서민들의 술안주였다. 대학가에서는 "가는 말이 거칠어야 오는 말이 곱다.", "장부일언 풍선껌", "남녀칠세 지남철" 등, 불후의 유행어들이 나돌았다. TV의 시대가 오면서 시대의 어둠을 아파하는 가수들도 늘어났다. 김민기, 한대수, 양희은, 서유석, 하남석, 김정호, 이필원, 박인희가 그들이었다. 1970년대는 또한 "금지곡"의 시대였다. 송창식의 《왜 불러》, 이장희의 《그건 너》,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신중현의 《미인》,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 등이 대표적인 금지곡이다. 이 중, 《거짓말이야》는 당시의 정치인들을 빗대어 표현했다는 혐의로, 《기러기 아빠》는 "아빠가 월남 파병 용사로 죽어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의 반열에 올랐다. 독재자 보다는 그 하수인들의 지레짐작이 빚어낸 촌극이었다. 한편, 1970년대는 "영자"와 "경아"라는
이름의 하층 여성들이 사람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경아"는 최인호 선생의 소설 『별들의 고향』의 주인공이고, "영자"는
조선작 선생의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 이름들은 단지 한 여성 주인공의 이름으로만 남지 않고, "개발독재"와
"압축성장"의 뒷골목에서 처절하게 유린당하고 해체된 도시 서민들의 삶을 상징하는 우리 모두의 누이의 대명사가 되었다. 저 빛나는 상처,
"전태일"과 함께였다. 그리고 1979년, <종신대통령>의 꿈은 개꿈으로 끝났다. 그 해에는 "민주화의 성지" 부산과 마산에서 반독재
투쟁의 불길이 올랐다. 무차별한 폭력과 마구잡이 연행에도 불구하고 "시민혁명"의 봉화불은 끊임없이 타올랐다. 유신의 핵심세력들은 당황했고, 점점
더 종말을 향해 치달았다. <부마항쟁>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자 권력의 2인자였던 차지철은, "크메루 루즈의 폴포트는 백만 명을
죽이고도 살아남았는데, 우리라고 못할 게 뭐냐?"라 하였다. 인종주의자 히틀러를 추종하였던 자다운 발언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한국형
인종주의자" 차지철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 앞에 그 비굴한 삶을 마감했다. 1979년 10월 26일, 장준하를 존경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그리고 유신독재는 "12.12"와 "5.18"을 향해
허물어졌다.
5.16에서 10.26까지의 시기에 유행한 말들은 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맛보기"에 불과한 위의 글로도 당시의 시대상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유행어의 표출 방식은 역사적 고비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5.16 쿠테타 이후의 말들은 민중들의 삶이 권력집단의 의지에 종속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유행어는 하나의 <민중적 이데올로기>를 가능하게 한다. 특정한 말과 결합하여 민중들만의 언어체계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담론에 저항하는 유행어는 그러므로 민중언어이다. "재건"에 저항하는 "차트 행정(탁상 공론)"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196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 본격적인 대중매체 시대에 접어들면서 유행어는 연예인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텔레비전의 출현은 그러나, 곧 "바보 상자"의 존재를 부각시켰고, 저속한 사랑을 "TV 사랑"이라 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지금도 유효할 것이다. 현실적인 삶을 그리기 보다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정치적 현실을 풍자하는 말은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감히 "각하"를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곧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현실 외면>이니, <허위의식>이니 하는 비판은 "먹물"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었다. '유행어'는 이미 민중들의 삶의 과정으로 녹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패한 절대권력이 지배하는 "겨울 공화국"을 관통하는 삶의 언어가 민중들에게는 있었다. 유행어의 생명은 풍자와 냉소이다. 또한 유행어는 민중들 사이의 대화에서 그 생존토양을 발견한다. 그 속에는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권력에 대한 정당한 분노와, 하루를 버티어내는 민중들의 힘이 있다. 유행어는 시대적 흐름의 한 축이었고, 도도한 역사의 강물을 건너가는 민중들의 나룻배였다. 유행어 자체가 삶을 실천하는 주체적 행위자였던 것이다. 민중들이 유행어를 유통시키는 것은, 현실의 반영이라는 측면보다는 굴절된 현실에 간섭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민중언어인 유행어를 "국어순화론자"로 대표되는 지배담론의 옹호자들은 "국어의 오염"이니, "언어의 혼란"이니 하는 말로 매도 하였다. <국어학>이나 <사회언어학> 또는 <언어사회학>도 이 시기의 유행어를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언어는 항상 현실적 삶과 결합하여 생산되고 유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민중언어는 관념적인 표준어를 고집하지 않는다. 삶의 물결에 따라 언어의 흐름도 달라진다. 유행어는 권위적이고 획일적인 국어사전을 신경쓰지 않는다. 또한 기존의 언어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물론 유행어에는 금새 사라지는 것도 있고, 오래 지속되는 것도 있다. 시대와 사회의 표정이 바뀌기 때문이다. 유행어는 정치와 소소한 삶을 아우르는 민중언어이다. 5000년 동안, 끊임없이 지배구조에 저항해온 민중들은 유행어라는 언어적 무기를 가지고 살아왔다. 유행어를 가리켜 언어를 뒤집어 엎는 이단자라 하는 이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대한민국 변혁세력의 강고한 진지인 인터넷의 언어를 "외계어"라는 이름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그 "외계어"의 숨은 의미를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언어권력"의 핵심을 움켜쥐고, 변혁하려 하지 않는 진정한 수구들이다. 유행어는 언어의 정당한 흐름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말(言)들의 풍경"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가장 소중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써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서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 3신(三神) 1945년 해방은 곧 말(言)들의 해방이기도 했다. "해방"이라는 말 자체가 해방되었고,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말이 유행하였는데, 그것들은 반드시 정치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었다.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에 걸쳐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말이 파고 들었다. 심지어는 걸핏하면 남을 비난하고, 욕하며, 남편과 아내를 따돌리고 "바람 피우러" 다니는 사람들의 입에서도 "자유"가 흘러나왔다. 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세를 타고 많은 정치 사회 단체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대부분 " ~ 주비(籌備)위원회"를 내걸었다. 그런 와중에 모두가 "독립운동가"요, "애국자"였다. 이 호칭에 식상한 이들이 사용한 것이 "혁명투사"였고, 그들 사이에서 "동지"라는 칭호가 친근감 있게 사용되었다. 그들의 적은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파","반민(反民)행위자"들이었다. 일본인들이 남겨 놓은 재산을 "적산(敵産)"이라 하였고, 그래서 "적산 가옥 한 채 차지했느냐."는 말이 유행하였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이 사생결단을 벌이는 가운데, "좌익"과 "우익"은 적대적 분위기로 연결되는 말이었다. 이 말들은 "흰둥이"와 "빨갱이"로 다시 정의되었다. "좌익"에서는 "세포", "프락치"라는 말들을 만들어 내었다. 제헌국회에서 "국회 프락치 사건"이 터져 "프락치"라는 말은 더욱 유행하였다. 북한의 민족반역자 처단과 사회주의화를 피해 38선을 넘어 월남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38 따라지"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을 운운하며 "신탁", "찬탁", "미소공위", "좌우합작", "단독선거"라는 말들도 위세를 떨쳤다. 그런 세상에 노래 하나가 떠돌았다. "미국놈들 믿지 마라. 소련놈에 속지 마라. 일본놈들 일어난다. 조선사람 조심해라." 이승만 추종자들은 그를 "국부"로 불렀다. "국부 리승만 박사"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 말은 민족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민족반역자집단(한민당)>을 향한 소리였다. 정부수립 후, "국부"는 "3신(三神)"으로 규정되었다. "외교에는 귀신, 내무에는 병신, 인사에는 등신"이라는 뜻이다. "벼락부자", "벼락감투"라는 말들도 등장하였다. "벼락부자"는, 일본사람 밑에서 일하던 자들이 "미군정"으로부터 은밀히 "불하"받은 "적산"을 발판으로 삼아 부자가 되거나, 미국의 "원조물자"를 빼돌려 부자가 된 것을 가리킨다. "벼락감투"는 정부 수립으로 "시골농부(지주)"가 일약 도지사나 장관으로 등용된 사례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그들 중에는 "모리배"들도 있었다. 경제적 특권을 찾아다니거나 힘 있는 자리를 찾아다니며 청탁하는 자들은 "낙하산 부대"라고 하였다. 그들은 곤란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사바사바"하고 "빽"을 썼고, 그게 잘되면 "국물"이 뒤따랐다. 이 밖에도 1940년대 후반에는, "할로(Hello)", "오케이", "기브미 껌", "양코", "코쟁이", "로스케", "원자탄", "풍년기근", "염생이", "이북", "이남", "마카오신사", "미스터", "닥터", "85 전(錢)", "해외에서 왔다.", "통역정치", "인플레", "코리안 피엑스(PX)", "코리안 타임", "근사하다." 등의 말들이 유행하였다. "미군정" 시대의 추한 유산이었다.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행어의 생산은 좀 더 구체화되고 다양해진다. 한국전쟁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유행어는 그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간다. "인민군", "빨치산", "바츄카포", "네이팜", "유엔군", "6.25", "인해전술", "종군기자", "수용소", "1.4 후퇴", "납치"라는 말들은 전쟁의 상처를 대변해 주었다. 대다수의 민중들은 "전쟁"보다는 "난리","난리통"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전쟁"이라는 말로는 그 고통을 담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난리통"에 "적산"이 "역산(逆産)"이라는 말로 둔갑하여 "역산가옥"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한강을 건너 피난 간 사람들을 "도강파", 그렇지 않고 서울에 남은 사람들을 "잔류파"라 하였는데, 나중에는 "잔류파"인지 "도강파"인지에 따라 삶과 죽음이 교차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역자"이다. "부역자"란 "인민군"이나 "빨치산"에게 협조한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러한 혐의를 받아 "국군"이나 "청년단"에게 학살된 사람만도 백 수십만 명에 이른다. "부역"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한 1950년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1951년의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그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인민군" 역시 일부 우익인사들을 "반동분자"라 하여, "인민재판"에 처하였다. 1950년 10월 4일, 각급 행정관청에서는 "피난민증"이 발급되었다. 수백만 명의 피난민들은 그것을 발급받아 자신의 정체를 증명해야 했다. "피난살이"로 허기진 "피난민"들은 먹을거리가 없어 "구호물자"에 의존하였고, "얌생이질"도 많이 하였다. "피난 수도"인 부산의 국제시장에서는 "노랭이", "딸라장수"들이 "일수변","딸라변"을 놓았다. 군대에서도 "황우도강탕(黃牛渡江湯-무늬만 쇠고기국)"과 "도레미탕(콩나물국)"이 흘러다녔다. 그 "난리통"에도 권력연장의 "모리배질"은 여전하였다. 부산에서 "정치파동"이 일어났고, 이승만 정권이 동원한 정치폭력배들인 "땃벌떼"나, "백골단"이 설쳐댔다. "1.4 후퇴"하면서 청장년들을 "국민방위군"에 징집하여 남하시키는 도중, 그 간부들이 막대한 식량을 부정유출하여 동사자, 아사자, 동상부상자, 낙오자들이 속출하였다. 그 처참한 대열을 일컬어 "죽음의 행진", "해골의 대열"이라 하였다.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골병대(공병대)", "탈바가지(헌병)", "(군에) 끌려가다.", "쑈리(Sorry)", "양공주 / 양갈보", "유엔마담 / 유엔사모님", "쑛타임(매춘부와 성관계를 1회 하는 것) / 롱타임(밤새 하는 것)", "나일론국(담배 혹은 신사)", "각하", "돌았다.", "공비", "슬픔이여 안녕.", "화폐 개혁" 따위의 말들이 유행하였다. 1952년에는 전국 각지에 "충혼탑"이 건립되었고, "문둥이" 병이 창궐하였다. 그리고 전쟁은 끝도 없이 계속 되었다. "국부 리승만 박사"와 "애국자"들을 대신해 "전쟁터에 나가 죽어도 아깝지 않은 천한 것들"은 많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에는 우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개의 유행어가 창조되었다. 하나는 "자유부인"이고, 다른 하나는 "사사오입"이다. "자유부인"은 당시 『서울신문』에 연재 중이던 "반민족행위자"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말썽을 일으키자 번진 말이다. 『자유부인』은 단 번에 베스트셀러로 등장하였는데, 당시 지배계급의 관념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류층 부인의 "프리섹스"를 다루었다. 그 덕분에 "자유부인"은 새로운 여성상으로 부각되어, 바람기 있는 여자나 남편의 지위를 빌어 옳지 못한 짓을 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또 "사사오입"은 자유당이 만들어 낸 최대의 걸작품이다. 1954년 8월 6일, <초대 대통령에 한정한 연임 제한 철폐>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11월 27일 투표를 하게되었는데, 그 결과 재적 의원 203명 중에 찬성 135, 반대 60, 기권 7표로 부결되었다. 개헌 정족수인 재적 3분의 2에서 1표가 부족했던 것이다. 국회 부의장이 부결되었음을 선포하였다. 다급해진 자유당은 긴급대책회의 끝에, 203명의 3분의 2는 135 명 하고도 0.33 명인데, 0.33명은 한 명의 인격으로 취급될 수 없기 때문에 135가 203의 3분의 2라는 "수학적"인 사사오입 개념을 도입하여, 부결선포를 번복하고 개헌안 통과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말이 안되는 일을 우길 때마다 "사사오입"하였다. "자유부인"의 영향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1955년에는 <댄스교사 박인수 사건>이 터져 "춤바람"이라는 말이 바람을 일으켰다. 박인수는 춤을 미끼로 돈많은 유부녀와 상류층 여대생들을 농락했는데, 대학 교수들이 그 여학생들을 찾으러 다니느라 "휴강"을 많이 하였는지, 대학가에서는 "휴강"을 "흐르지 않는 강"이라 하였다. <3선 개헌안>의 "사사오입" 통과 후, 자유당은 1956년 당대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국부 리승만 박사"가 무슨 이유에선지 "불출마" 의사를 밝히자, 자유당에서는 그의 출마를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민주당 의원 조재천은 국회에서, "대한노총(현재의 한국노총) 산하의 <우마차(牛馬車) 조합>에서 수백대의 우마차를 동원, 이박사의 재출마를 절규하는가 하면, 죽은 사람의 도장까지 연판장에 찍는 판이니, 이것은 '민의(民意)'가 아니라 '우마우의(牛馬牛意)', 심지어는 '귀의(鬼意)'까지 동원한 것이 아닌가." 하고 소리 높여 꾸짖었다. 이 발언은 금새 "우마우의"라는 새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같은 해, <시계 밀수사건>이 터졌다. 국회 부의장과 국회의원이 관련되어 논란이 일었는데, 그 사건의 주범이 "마카리오 장"이라는 자였다. 그리하여 "마카리오 장"은 밀수의 대명사가 되었고, 그 이후로 밀수꾼들을 지칭하는 말로 크게 애용되었다. 1956년 10월 1일, <이익흥 내무장관 불신임안>이 발의되었을 때, 민주당 의원 류옥우가 이익흥에게 다음과 같은 "덕담"을 건넨다. "광나루에 이승만 대통령을 따라 낚시를 간 이익흥 내무장관이, 이박사의 방귀소리를 듣고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니, 이것은 아첨의 극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후,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는 이승만 정권의 주구들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로 널리 쓰였다. 이듬해에는 이승만의 양자가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이승만의 양자로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이 "간택"되었는데, 당시 서울대 법대는 이강석의 "부정편입" 문제로 말들이 많았다. 그 때 경상북도 월성군 군청에 갑작스럽게 이강석이 나타났다. 군수는 "<귀하신 몸>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하고 극진히 "모셨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가짜로 밝혀졌다. 가짜 이강석에게 실형이 구형되었을 때, 신문들은 하나같이 《"귀하신 몸"에 징역 1년 6개월 구형》이라고 제목을 붙여 보도했다.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 "귀하신 몸"들이 크게 늘어났다. 1958년 12월 24일, <국가보안법 파동> 당시에 자유당이 가죽잠바를 입은 무술경위 3백여 명을 동원하여, 본회의장에서 "점거농성" 중인 야당의원들을 강제추방하고 연금시킨 뒤, 각종 법안을 "날치기 통과" 시켰다. 그리하여 "가죽잠바"와 "무술경위"가 "날치기"로 등장하였다. 특히 "가죽잠바"는 훼방꾼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통용되었다. 이승만 앞에서라면 무조건 "지당합니다. 지당합니다."를 노래하거나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부류들을 가리켜, 당시 야당이건 민주당에서는 "지당장관(至當長官)", "낙루장관(洛淚長官)"이라는 직책으로 불렀다.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다보니 고유의 촌수(寸數) 관계도 혼란스러워졌다. "애인"을 "오촌 오빠"라 한 것이다. 1959년에는 "사라"호 태풍이 삼남지방을 휩쓸었다. 이후 "사라"는 한동안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악귀들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대학생들은 기호식품인 담배를 "삼국사기"라 불렀다. 당시 담배를 의미하는 은어는 "부식"이었는데, 이 "부식"이 『삼국사기』의 집필자인 김부식과 연결되어 "삼국사기"가 담배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대학가에서 유행한 말인 탓인지 다소 복잡한 유통과정을 거친 것이다. "6.25" 직후에 나타난 "요새 아다라시(숫처녀)가 어딨노?"와 "나이롱 처녀"라는 말도 이 때 다시 유행하였는데, 이는 황색언론의 기사와 관계가 있다. 1950년대 대표적인 황색저널리즘인 『야담과 실화』는 1959년 1월호에서 《서울의 숫처녀는 불과 60%도 못된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60%라는 비율은 당시로서는 매우 커다란 충격이었으나,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경이적으로 높은 비율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이 밖에도 각종 유행어들이 1950년대를 풍미했다. "개판", "공갈", "거수기(자유당 국회의원들)", "날치기 사회(司會)", "사모님",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봐야 별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좋은 자리 있을 때 봐줘.", "스타일 버렸다.", "치마바람", "맘보 쓰봉", "어깨 / 깡패", "복도 많지 뭐.", "되민증(道民證-시골사람)", "사이사이 떨다(아첨하다).", "형광등(둔한 사람)", "치기배", "왕초", "똘마니", "쎄리 / 짜부 (순경)", "국제얌체", "빨간 딱지 / 청춘 차압장(징집영장)", "알간디 교수(무능한 교수)", "금붕어(다방에서 죽치는 여대생)", "군바리", "땅개", "개병대", "아리랑 군대(한국군)", "상납", "떡값", "급행료(뇌물)", "이동수금원(운전사로부터 돈 뜯는 교통순경)", "담배값(용돈)", "낙하산 융자", "영계자금(산업은행의 연계자금)" 등이 당시 민중들의 유행어 풍속도였다. 그러한 말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민중들은 "죽일놈", "개새끼", "개자식" 등의 욕설로 당대의 인물들을 평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는 "무더기표", "올빼미표", "피아노표", "빈대표", "쌍가락지표"라는 새로운 말들을 만들어냈다. 이어 일어난 <4.19 시민혁명>을 기념하는 유행어는 "국민이 원한다면"이었다. 이승만이 하야성명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도 내놓겠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이 말은 즉각,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내가 한 잔 사지."로 격하되었다. 이 말은 유행어 아닌 유행어였다. 이승만 이후에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파렴치한 행위를 변명하는데 주로 쓰였기 때문이다. 4.19 혁명은 "데모" 바람을 일으켰다. 초등학생들도 플래카드를 들고 나왔으므로, 후일 관제언론에서는 "데모만능시대"라 칭했다. 그러나 이것은,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4.19 이후의 민주화 요구를 헐뜯고, 자신들의 불법을 호도하려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정당한 주의나 주장이 어찌 "데모만능시대"인가. 지금의 <조중동>이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을 일컬어 "국가경제를 좀 먹는 벌레"라 칭하는 행위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4.19에는 물론 어두운 면이 있다. 1964년부터 종로 3가에서, 20세의 나이로 매춘부 생활을 하게된 "직업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1960년 4월 18일, 중학교 동창이 "데모나 하고 놀자."고 하자, 아무 생각없이 창경원(지금의 창경궁) 앞에서 데모대의 지프차에 올랐다. 대학생들과 지프를 타고 근처를 "왔다리 갔다리"하다가, 다음날인 4월 19일 새벽 2시경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는데, 길음지서 근처에서 차가 고장났다. 이를 보고 순경들이 지프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그녀의 왼쪽 젖가슴과 턱이 떨어져 나갔고, 오른손이 잘려나갔다. 그녀는 이후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포장>이라는 훈장을 받았으나, 생계수단이 막막했던 그 "4.19 소녀"는 종로 3가의 꽃이 되었다. 그리고 4.19를 배신한 자들은 고급 "요정"에서 "조국근대화"를 건배하며, 그녀들의 젖가슴을 주무르고, "수청"을 받았다. 그 자들은 지금 우리 사회의 "메인 스트림(주류 세력)"이 되어 자신들을 대신해 피흘린 이들을 두고두고 겁탈하고 있다. 유행어는 백성의 소리이다 해방 이후 4.19까지 쏟아져 나온 유행어들만 보더라도, 우리는 한국 현대사가 어떠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다. 유행어는 당대의 현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유행어는 단순한 반영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 역사와 정치를 가로지르며 구체적 현실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그 열망의 형식은 매우 다양하다. 풍자일 수도 있으며, 냉소일 수도 있고, 욕설이거나, 비유, 혹은 직접적인 저항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유행어를 살아 있는 언어로 존재하게 하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민중언어만의 생명력이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라도, 민중들의 가슴에는 갓잡아 올린 생선회처럼 펄펄 뛰는 언어의 힘이 살아 있었고, 따라서 수구부패세력의 그 어떤 말장난도 무력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유행어들에는 "풍자의 미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든 유행어가 정치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대다수의 유행어들은 민중의 건강한 정치의식과 맞닿아 있다. 유행어의 최초 생산자는 매우 다양하지만, 결국 그 말들을 소비하는 최종 소비자는 민중인 까닭이다. 유행어에는 당대의 질곡을 헤쳐가는 민중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삶들이 뒤범벅되어 있다.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음식중의 하나인 "비빔밥"처럼, 저 높은 곳에 군림하는 수구부패세력들이 조작하는 무수한 언어들 사이에서 그 거짓 핵심을 간파하고, 일상의 언어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바로 민중이다. 하루하루의 나날들이 그 날들의 역사인 것처럼, 단 하루도 역사적이지 않은 날들은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발언을 조작하여 그 말들의 참된 의도를 뒤바꾸고, 곡학아세의 행진을 하는 자들의 언어는 그날그날의 왜곡의 증거일 뿐이다. 먹을 수 없는 "똥"을 가리켜 먹을 수 있는 "된장"이라 우기는 자보다, 먹을 수 있는 "된장"을 가리켜 먹을 수 없는 "똥"이라 하는 자들이 더 해로운 것은 바로 오늘의 우리 정치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대형유통점만을 드나드는 자들이, 결코 재래색 시장좌판에서 얼어붙은 손을 부비며 앉아 있는 어머니들의 고단함을 알 수 없듯이, 민중의 삶과 기꺼이 함께 하려는 사람들은 민중들의 언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TV 토론회의 한 구석에서 근엄한 표정으로 온갖 인상을 쓰며, 그렇지 않아도 삶이 힘겨운 서민들에게 역겨움만 안겨주지 말고, 선거철만 되면 너도 나도 "서민의 자식"이라 거짓말하며 뒷구멍으론 콩나물값 몇 백원을 깎는 추잡한 짓거리도 하지 말고, 가까운 재래식 시장으로 나가 배추 포기를 날라라. 물론 일당도 받아야 한다. "무노동 무임금"은 재벌들의 규정이 아니라, 서민들의 삶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못알아 먹는다면,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의 수구부패세력의 밤길은 아마도 "등 뒤를 조심해야" 하는 "공포"와 "짜증"의 밤길이 될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만.
출처 http://www.jinyoung.co.kr/dangam/jin-22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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