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지옥’ 감상 후기
웹툰을 원작으로 하여 우리나라에서 제작하고,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되고 있는 ‘지옥’이란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작품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떤 예고도 없이 갑자기 등장하는 지옥의 사자들이 죽음을 알리는 ‘고지’의 형태로 지옥행을 알리고 초자연적 현상이 발생하면서 해당하는 사람은 ‘지옥’과 같은 고통을 맛보면서 죽음을 맞는다. 이런 혼란을 이용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종교단체인 ‘새진리회’와 사건의 실체를 밝히려는 조직이 서로 얽히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모습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지옥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저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지금의 이 세상에 있으며, 그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 행해지는 ‘고지(告知)’와 ‘시연(示演)’을 매개로 하여 죽음이라는 형태로 사람들의 눈앞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신진리회’에 의해 주장된다. 신으로 대변되는 어떤 존재, 혹은 현상에 의해 죽음을 통보받은 사람은 ‘신진리회’라는 종교단체에 의해 무조건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당사자의 죽음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으면서 그들의 교세 확장에 이용된다. 그러나, 어떤 것에 대한 작용이 있으면 반드시 반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니 ‘신진리회’의 위선에 맞서 그 가면을 벗기려는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하면서 숨기려는 자와 드러내려는 자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신진리회’ 주장의 핵심적인 근거는 이분법에 근거한 흑백논리다. 자신들의 주장과 조직을 따르고 믿는 사람들과 그것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대편에 선 사람들로 나눈다. 앞에 속한 사람들은 아방(我方-내편)이고, 뒤에 속한 사람들은 타방(他方-상대편)이 됨과 동시에 타방은 적으로 간주된다. 이런 논리에서는 협상이나 양보 같은 것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고, 오직 타도, 죽음, 파괴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신진리회’를 지배하고 지탱하는 생각이고, 행동 양식이다. 색깔로 치면 흑과 백 외에 다른 색은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는 식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의 하나일 뿐인데, ‘신진리회’는 이것을 신의 뜻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을 협박하고, 공포의 도가니로 내몬다. 죽음은 죄인을 지옥에 보내는 것이라고 하면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홍보한다. 죽음을 통보받은 사람들 모두는 신에 의해 죄를 지은 존재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죄인의 죄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누가 보아도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거나 지을 시간조차 없는 존재가 죽어야 한다는 통보를 받기도 한다. ‘신진리회’는 죄인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데, 정작 죄인인지 아닌지 누구도 알기 어려운 것이다. 지은 죄목이 밝혀진 사람도 그것이 정말로 지옥에 가야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인지는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신진리회’라는 조직의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혹은 초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정한 현상을 마음대로 해석하여 신의 이름으로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세상 사람들을 이편과 저편으로 갈라쳐서 공포로 몰아넣음으로써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이득을 보는 방식이 바로 신진리회가 하는 대표적인 행태다. 내가 강남에 살아봐서 하는 말인데, 모든 사람이 그곳에 살 필요도 없고, 살 수도 없다는 어떤 공직자의 발언이나 생각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힘을 강화하여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자신의 교주를 희생하기도 하는데, 그 결과 ‘신진리회’의 세력은 공권력을 마음대로 부릴 정도로 막강해져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독보적인 조직이 된다.
이런 정도로 작품을 이해하고 나면 과연 감독은 무슨 의도로 이러한 드라마를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이비종교의 폐해를 비판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비현실적인 현상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깊은 의도가 있는 것인지 등의 의문이 연기처럼 피어오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우리가 처해 있는 작금의 현실을 되돌아보면서 드라마와 연결해보면 명쾌하게 풀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근래에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실제 상황에 대입해보면 맞춘 듯이 똑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그 부분을 짚어보자.
드라마에서 ‘신진리회’는 대다수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지옥을 현실로 끌어와 정의를 실현한다고 하면서 신의 이름으로 죄인이라는 굴레를 씌워 처형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어 자신들을 따르고 경배하도록 만든다. 여기에 반대하면서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징벌을 가하는데, 여기에 동원되는 존재가 화살촉이라고 하는 막무가내식으로 무자비한 폭력집단이다. 이들에게는 법도 없고, 상식도 없으며, 이성도 없다. 오직 자신들의 생각과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일만 할 뿐이다.
이와 판박이라고 할 정도의 현상들을 우리는 2018, 2019년부터 지금까지 무수히 경험해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정한 단위의 정치 세력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하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 만민평등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민주라는 이름으로 정의를 구현한다고 하면서 자신들과 반대편에 서는 수많은 사람에게 죄인, 친일 등의 굴레를 씌워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 사라져야 할 존재로 규정하고, 탄압한다. 자신들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절대로 용서를 구하지 않으며, 잘못한 행위에 대한 죄를 물어 벌을 내리는 기관이나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항변하면서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물리력을 행사한다.
이렇게 되자 대한민국 국민은 나의 편과 적의 편(我方他方-1980년대에 소위 운동권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침서로 일컬어졌던 프린트물이다)이라는 프레임 중 어느 한쪽에만 속해야 하고, 모든 것에서 갈등과 투쟁만 일삼는 상황으로 치닫고 말았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임대인과 임차인, 기업가와 노동자, 약자와 강자 같은 것으로 나누어지면서 서로를 증오하게 하면서 적으로 여기도록 만들어 버린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거나 그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모두 적이 되어 타도의 대상으로 몰아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다. 뉴스를 통해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소식에 이러한 부류의 사건, 사고가 유독 많은 이유나 원인은 갈등을 유발하는 일정한 세력에 의해 유도되는 사회적 흐름이 그렇게 형성된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부동산을 가져도 죄인이고, 집을 가져도 죄인이며, 임대사업을 해도 죄인이 되는 세상이 되어 버리면서 이런 존재는 모두 징벌과 약탈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판단과 징벌적 처분은 드라마에서 죄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신의 이름으로 죄인이라 낙인찍고 지옥의 시연을 하는 ‘신진리회’의 행위와 거의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드라마의 앞부분에서 ‘신진리회’를 세운 1대 교주가 희생되면서 후반부에서는 2대 교주의 시대가 열리는데, 교세는 더욱 커짐과 동시에 한층 무자비한 폭력과 징벌을 일삼는 조직으로 바뀐다. 2대 교주는 화살촉이라는 행동 조직을 충분히 이용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로 삼는데, 우리의 현실에서는 자칭 폐족이 되었다가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되살아난 후 적극적 팬덤 조직(이것은 대0문이라는 세 글자로 줄여서 말하기도 한다)을 활용하여 막무가내식 주장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집단으로 탈바꿈한 정치조직과 제대로 닮은 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편이 아닌 다른 편에 속한 것으로 규정된 사람은 누구든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목적에 맞지 않는 사람도 징벌적 부담을 져야 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 이것 역시 드라마에서 ‘신진리회’가 추구하고 행동하는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언론도 개혁의 대상이며, 사법부도 개혁의 대상이고, 검찰도 개혁의 대상이며, 부동산을 가진 자는 죄인이기 때문에 징벌적 과세의 대상이고, 기업은 규제와 징벌과 약탈의 대상이며, 임대인 역시 징벌적 과세의 대상이 된다. 부동산을 가진 사람이 모두 팔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 것이며, 기업을 하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이고, 임대사업을 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과연 모든 사람이 자신의 집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뭉게구름처럼 일어날 정도다.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 보자. ‘신진리회’가 내로남불식 편견과 잘못된 행동으로 세상을 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거짓된 가면을 벗겨 진실을 드러내려는 조직도 힘을 가지게 되면서 찍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당하기만 할 줄 알았던 일반 사람들의 세계와 연결되면서 한순간에 그 조직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것은 바로 죄를 지을 겨를도 없었던 갓 태어난 아기가 부모의 보호 아래 생존하게 되고 지옥의 고지가 실현되지 못함으로써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신의 이름으로 왜곡되었던 세상이 다시 사람 중심의 세상으로 돌아오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것은 상당히 오랫동안 왜곡되어 있었던 우리의 현실 역시 일정한 순간이 오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상식이 통하고, 진정한 의미의 공정이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는 세상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의 마지막 부분에서 ‘신진리회’를 움직이는 간부와 집행 요원 등은 자신들의 존재 기반을 통째로 날려버릴 가능성이 있는 갓난아기의 지옥행 시연 중계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하다못해 원죄 이론까지 들먹이기도 한다. 그렇게 되자 이들의 행동은 더욱 난폭해지고 무자비해지면서 경찰과 같은 공권력을 마음대로 이용하면서까지 무리한 탄압과 폭력을 일삼는다.
이것은 야당이 반대하는 법률안은 전부 패스트트랙에 올려서 단독으로 처리하면 된다는 어떤 대통령 후보자의 폭언과 매우 흡사한데, 이런 현상들은 마지막을 향해가는 존재들의 발악 같은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신진리회’의 위세에 눌려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일반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서 그들의 가면을 벗기면서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것 역시 일반인들이 전면에 나서서 사회를 바로잡고 역사를 바꾸는 일이 가까운 시일 안에 우리들의 손에 의해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승의 공간을 이승의 공간으로 치환하고, 그 경계에 있는 죽음이라는 화두를 통해 현재 우리가 처한 심각한 문제들을 직시하고자 한 ‘지옥’이란 드라마는 지금의 순간이 비록 힘들고 괴롭기는 하지만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면서 살펴보고, 모두가 힘을 합쳐 올바른 선택을 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정상적인 세상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드라마야말로 깊이 있는 성찰하는 시청자를 향한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오마0 뉴스의 기사에서 말한 것처럼, ‘지옥’은 복잡한 상념에 휩싸일 필요는 없고, 가볍게 킬링타임으로 즐기면 된다는 식으로 감상한다면 아주 한심한 드라마가 될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날카로운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면서 본다면 이보다 더 감동적이고, 무게를 느낄 수 있는 드라마도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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