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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세계/觀看天下

두 개의 생명과 나의 아버지

by 竹溪(죽계) 2019.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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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아들 대학 입학식날 고향에서 올라오신 아버지와 함께 독수리상을 배경으로 분수대 앞에서 찍은 사진



내게는 두 개의 생명이 존재한다. 육체적 생명과 학문적 생명이 그것이다. 육체적 생명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나 숨을 쉬는 순간부터 얻어지는 것이지만, 학문적 생명은 스스로의 의지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 생명을 모두 주신 분은 바로 아버지였다. 육체적 생명의 씨앗이며 뿌리가 아버지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지극히 자명하다. 나의 학문적 생명을 이루는 핵심은 아버지가 평생 동안 지니고 계셨던 배움에 대한 열정과 믿음이었다.


아버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징용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집을 떠나 몇 개월 단위로 거주지를 옮겨가면서 지내셨다. 그러한 까닭에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젊은 시절을 무척이나 아쉬워하셨는데, 이것이 배움에 대한 열정과 믿음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던 이러한 열정과 믿음은 내게 공부를 하려는 의지와 계기를 만들어주는 원동력이었고, 학문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준 바탕으로 작용했다. 특히 내가 열심히 공부 하겠다는 의지와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자 말자 일말의 망설임이나 한 치의 의구심도 없는 완벽한 믿음으로 막내를 뒷받침해주신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평생을 공부와 학문에 매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부에 대한 아버지의 열정과 믿음은 내게 학문적 생명을 준 직접적인 모태로 작용했던 것이다. 


  경상북도 예천군 은풍면 송월리라는 백두대간의 첩첩산중 마을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여덟 살 되던 해에 입학한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군대 3년을 제외하고는 학교를 벗어나 생활해 본 적이 없었다. 학생일 때는 새로운 것을 배우느라 학교에 다녔고, 교수가 된 때로부터 지금까지는 교육과 연구를 하느라 학교에 다니고 있다. 어머닌 46세에 나를 낳으셨는데, 지금의 상황에서도 노산이라고 할 수 있으니 당시는 말 할 것도 없었다. 아이는 머리만 조금 내밀고 나오지 못했으므로 어머니의 산고는 극에 달하였다. 산모와 아기가 모두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당시에 쌀 한가마니를 비용으로 지불하고 이십 리 밖의 군청소재지에서 모셔온 산파가 겸자(鉗子)로 집어냈는데, 아이는 24번 만에야 겨우 집혀서 세상 밖으로 완전히 나올 수 있었다. 겸자로 집었던 머리는 가죽이 다 벗겨져서 상처투성이였는데, 죽지 않고 산 것 자체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여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노산인 탓도 있었겠지만 산모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정도로 머리가 컸다는 것이기도 한데, 모자를 써야 하는 중고등학교에서는 내 머리에 맞는 모자를 구하느라 입학할 때마다 고생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내게 맞는 모자를 구하기가 어려운 것은 군대에서도 계속되었는데, 몇 달 동안이나 두통이 올 정도로 작은 모자가 머리를 조이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머리가 아파서 모자를 벗고 다니다가 직속상관한테 적발되어 얼차려를 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군대에서는 모자를 훔쳐가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모자를 잃어버리더라도 나는 걱정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훔쳐간 모자가 너무 큰데다가 모양이 울퉁불퉁해서 도저히 쓸 수 없었던 사람들이 사흘 안으로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다.


거의 평생 동안 공부와 교육과 연구를 한 것은 맞지만 중간에 게으름을 피운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만화와 문학전집 등을 읽는 재미에 빠져 학교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아서 성적이 최하위 수준이었는데, 그 때에도 아버지께서는 크게 혼을 내거나 잔소리를 하시지는 않았다. 백두대간의 중간 지점인 소백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오지 중의 오지에 있는 시골 초, 중학교가 수십 년 전에 무슨 수로 문학 전집 같은 도서를 구비하고 있었을까 하고 의아해할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특수한 사정이 하나 있었다. 내가 다니던 순흥초등학교와 소수중학교에는 세계명작과 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 등의 문학과 교양서적이 커다란 도서실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이 있었는데, 모든 책에는 ‘육군대장 김계원 기증도서’라는 검은 색의 도장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분은 제3공화국 시절인 1978년부터 이듬해 10,26사건이 발발할 때까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사람이었는데, 바로 옆 동네로 영주시 풍기읍 출신이었다. 당시 육군대장의 지위에 있으면서 애향심이 남달랐던 그 사람은 고향의 초, 중등학교에 책을 기증했고, 그것이 내가 다니던 학교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문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일곱 살 때부터 동네 전기수(傳奇叟)를 하면서 할머니들께 읽어드렸던 고전소설과 역사소설 등에 대한 지식과 재미가 첫 번째이고, 초, 중학교 때 읽었던 ‘육군대장 김계원 기증도서’들이 두 번째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학교 공부를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던 이 시기에 나를 주제로 하여 아버지께서 친구들에게 주로 말씀하셨던 것은, ‘막내가 공부를 하면 잘 할 것 같은데, 소설책에 빠져서 학교 공부는 도통하지 않으니 걱정이라네’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고독과 죽음을 중심으로 하는 삶에 대한 고민과 문학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 아름다움에 빠져 1학년을 보낸 나는 2학년의 어느 봄날에 우연히 던진 친구의 말 한 마디를 기점으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공부하는 일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막내아들에 대한 믿음을 아주 적극적으로 드러내셨고, 내 공부를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문제제기나 일말의 의혹도 가지지 않으시고 무엇이나 할 수 있도록 하는 상황을 만들어주셨다. 오랜 동안 문학에 빠져 지냈던 내가 당연히 국문학과로 진학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에도 아버지는 아무런 조건 없이 무조건 허락하셨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의 산업부흥기라고 할 만큼 경제성장에 모든 것을 쏟아 부울 때였으므로, 고향의 어르신들은 거의 모두가 대학을 가려면 당연히 공대나 법대를 가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의 국문학과에 진학했을 때 고향의 아버지 친구분들은, ‘자네 막둥이는 정신 나간 녀석’이라고 마구 몰아붙이면서 매우 심한 말들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어떤 비판이나 평가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막내에게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셨다. 막내아들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국문학 전공으로 다시 대학원을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도 두 말없이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으로 나타났다.


막내가 공부를 하겠다고만 하면 세상 끝까지라도 뒷바라지 하시겠다는 뜻이었다. 대학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옛날 어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원 진학까지 허락한 것은 막내의 판단에 대한 아버지의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유추해 볼 따름이다. 그 전에는 잘 모르다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 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은 사람이 일생을 사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해 낼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막내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얼마나 컸었던가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한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효도라는 것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신 어머니께는 공부도 안하는데다가 말도 잘 안 들으면서 말썽만 피우는 막내아들이었고, 대학원 박사과정 중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께는 용돈 한 번도 드린 적이 없는 불효막심한 아들이었다. 다만 “막내가 대학원까지 진학해서 공부하는 것은 조선시대로 치면 과거 급제한 것이나 같다”고 혼잣말처럼 되뇌던 아버지 말씀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그 분이 인생의 말년을 기분 좋게 보내도록 해드린 것 하나가 효도라면 효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 해석이므로 객관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과거로부터 지금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미래에도 굳건하게 남아 있을 것은, 막내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절대적인 믿음과 충분한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평생을 공부하면서 살 수 있었던 자신이 있다는 사실 하나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분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육체적 생명과 아버지의 믿음으로 주어진 학문적 생명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물려받은 지상 최고의 유산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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