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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단상/기타

중봉 조헌과 기허당 영규

by 竹溪(죽계) 2019.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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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들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이 없었더라면,

우린 지금 내 나라에서 내 말을 하며 살고 있을까?

 

중봉(重峯) 조헌(趙憲)선생과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대사!

옥천으로 조헌선생과 영규대사의 자취를 찾아 떠났다.

 

옥천에는 조헌(趙憲)선생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

대청호둘레길 도보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지당(二止堂). 또한 후율당(後栗堂).

이 두 곳은 중봉선생이 후학을 가르쳤던 서당이다.

 

이번 역사기행에선 우선먼저 중봉선생의 묘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옥천 구(舊)시가지를 벗어나 37번 국도를 따라 달린다.

인포삼거리에서 우회전해 575번 지방도로 들어선다.

조금 가다보면 도로왼편에 조헌선생 묘소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농암저수지를 지나면 다시한번 이정표가 나온다.

 

황촌(黃村)방향으로 좌회전한다. 황촌은 대전의 송촌(宋村)처럼 황씨(장수 황씨)들이 모여사는 동네다.

황촌을 지나 조금 가면 조헌선생 묘소의 존재를 알려주는 신도비(神道碑)가 도로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왕이나 고관(2품이상)들의 공적을 기록해 놓은 신도비는 보통 묘소의 동남방향이나 마을입구에 설치한다.

글은 당시 좌의정 청음(淸陰) 김상헌이 짓고, 이조판서 동춘당(東春堂) 송준길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서원(仙源) 김상용이 썼다.

 

신도비를 살펴보고 도로 건너편으로 난 길로 몇 발자욱 띄니,

왼편 저 멀리 노송(老松)들의 품안에 아늑하게 안겨있는 조헌선생 묘역이 보인다.

묘역 초입에 들어서니, 왼쪽엔 표충사(表忠祠)가 있고, 오른쪽엔 재실이 위치하고 있다.

재실 뒤편을 올려다보니, 오랜 연륜의 노송들이 조헌선생의 묘소를 지키고 있다.

 

표충사의 대문은 충의문으로 가운데 문이 높고 양쪽의 문이 낮은 솟을삼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삼문에 들어서면 주병덕 전(前)충북지사가 쓴 '표충사'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다.

이 곳에 중봉선생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표충사 안을 둘러보고 나오니,

잔디밭에 중봉선생의 시비가 있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음미하며 낭송해 보는 여유를 가져봤다.

 

지당(池塘)에 비 뿌리고 / 양류(楊柳)에 내 끼인 채 /

사공은 어디 가고 / 빈 배만 매였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 오락가락하더라

 

재실인 영모재(永慕齋)안을 둘러보고 나와

돌계단을 쉬엄쉬엄 올라가니, 중봉선생이 모처럼의 방문객을 반겨 주는 듯하다.

아직 금초는 안했지만, 무척 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풍수쟁이는 아니지만, 묘소에서 이 곳 저 곳을 바라보니, 명당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좌청룡, 우백호의 산줄기가 뻗어나가고, 앞은 안산(案山)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선지 중봉선생 묘소주변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아늑하다.

묘소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붉은 빛 돋아나는 낙락장송들이 더욱더 포근함을 선사(膳賜)하고 있다.

다만, 묘 뒤쪽이 조금은 틔어있어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준다.

 

우암선생이 중봉의 공적을 기려 쓴 비석이 있고,

묘소 양편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자리하고 있다.

돌표면엔 거무스름한 묵은 이끼들이 잔뜩 감싸고 있어, 오랜 세월을 웅변해주고 있다.

 

중봉묘소에서 상당시간 지체한 뒤,

신도비 근처에 주차해 놓은 차를 재차 몰아 안내면 답양리로 향했다.

영규대사를 뵈러 가기 위해서다.

채운산(彩雲山)품안 깊숙이 안겨있는 천년고찰 가산사(佳山寺)를 찾았다.

 

가산사는 참으로 특별한 곳이다. 단지 천년고찰이라서가 아니다.

그 옛날 이 일대는 오지중의 오지였다. 지금이야 도로가 나서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주변에 막지봉이 있고, 산넘어 가면 보은군 회남면 은운리(隱雲里), 분저리가 있다.

속리산의 산줄기가 이 곳까지 뻗쳐내려 오고 있다.

주변의 산능선을 올려다보면 목이 완전히 뒤로 젖혀질 정도로 아주 높다.

심상치 않은 산의 정기(精氣)가 느껴진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다.

 

이러한 산자락에 가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 옛날 통일신라때 먼훗날 나라가 위태로울정도의 큰 외적이 쳐들어올 것을 예견하고 이 절을 지었다 한다.

이 곳에서 강병(强兵)을 육성해 나라를 구하라는 메세지였으리라.

실제 이 곳에서 임진왜란때 영규대사의 800여 의승군(義僧軍)과 중봉선생의 1,600여 의군(義軍)들을 훈련시켰다.

이 곳에서 훈련을 마친 2,400여 의승군과 의군들이 청주성탈환에 성공해,

임진왜란 발발후 육전(陸戰)에서의 최초 승리를 거뒀다.

 

청주성전투에서 살아남은 군사들은 그 여세를 몰아

호남지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금산성의 왜군들을 격퇴시키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다.

1592년 8월 '제2차 금산전투'(일명 '금산성 연곤평전투')라 불리워지는 이 싸움에서 거의 모든 의병들은 장렬히 전사했다.

현재 이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칠백의총(七百義塚)'을 조성해 국가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중봉선생의 시신은 제자들이 수습해 별도의 묘소를 조성해 모셨다.

영규대사는 금산전투에서 중상을 당한 뒤,

천비산 중암사로 잠시 피신했다가 출가했던 공주 갑사 청련암을 향해 가던 중

갑사 조금 못미쳐 계룡면 월암리(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입적했다.

 

현재 천비산의 천년고찰 '중암사'엔 '영규대사순의비'가 있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영규대사가 갑사로 향할 때 벗어놓았던 피묻은 갑옷은

1932년 절에 화재가 발생해 소실됐다고 한다.

현(現)계룡면사무소앞엔 '의병승장영규지려'란 정려각이 세워져 있다.

영규대사의 묘소는 출생지인 공주군 계룡면 유평리(일명 '버들미'마을) 선산에 있다.

 

가산사엔 특이한 분이 계신다. 주지스님인 '지승'스님이시다.

지승스님은 우리 한민족의 상고사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

호국사찰이란 가산사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1999년부터 매년 사찰내 천제단에서 '단군제(檀君祭)'를 지내고 있다.

지승스님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뒤, '단군제'때 꼭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다.

절에서 '단군제'를 드린다는 것이 웬지 커다란 호기심(好奇心)을 자극했다.

 

글을 마치면서 하나 더 언급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지승스님은 현(現) '칠백의총'에 관해 서운한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현재 불교계든, 관련학계에선 '칠백의총'이 아니라 '천오백의총'으로 정정해야 한다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당시 조선이 유교의 나라라 보니, 금산성 연곤평전투에 참전해 전멸한 의승군 수는 누락된 채,

중봉선생의 의군 700여명만 기록돼 '칠백의총'이라 하게 됐단다.

당시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동안 국회에 이의 시정을 요청해 회기때마다 상정되었지만 번번히 폐기됐었다고 한다.

지승스님은 종교를 떠나 몸을 바쳐 나라를 지킨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지승스님은 현재 순절한 승군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셨다.

 

지승스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씁쓸한 마음 부둥켜안은 채 대전으로 향했다.

 

조헌선생의 묘소 위치방향을 알려주고 있는 이정표

저 멀리 조헌선생의 묘역이 보인다

 

 

조헌선생을 기리는 재실, 영모재(永慕齋)

 

 

 

조헌선생 묘소에 이르는 돌계단

 

조헌선생의 묘소. 전형적인 좌청룡, 우백호의 형세를 갖추고 있다. 다만, 묘소위쪽인 조산(祖山)방향이 허(虛)한 편이다.

 

조헌선생의 묘비(墓碑)

 

 

주가석, 향로석, 축판석(왼쪽부터)의 기둥무늬가 입체적이다

조헌선생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아들 조완기(趙完基)의 제사를 모시는 표충사

 

 

 

 

 

 

임진왜란때, 의병과 의승병을 훈련시켰던 가산사(佳山寺)를 찾아간다

 

마을유래에서 임진왜란때의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드디어 가산사 초입에 들어선다

 

마침내 가산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가산사는 그동안 오지(奧地)중 오지에 위치하다보니,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천년사찰이다.

일정(日政)땐 독립의지를 키워왔던 곳이다. 이로 인해 일정(日政)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

영정각과 산신각

영정각안엔 조헌선생과 영규대사가 모셔져 있다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장고개를 들렀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대청호!

올들어 언젠가 대청호둘레길산행에서 막지봉에 올랐던 추억의 편린(片鱗)들이 아삼삼 떠오른다

 

 

 

저 멀리 아름다운 채운산(彩雲山) 능선이 부드럽게 흘러가고 있다. 속리산에서 계속해서 뻗쳐온 능선이다.

 

 

대전으로 돌아오는 도중, 모처럼 장계국민관광단지도 찾아봤다

먼 옛날 놓여졌던 돌다리. 통일신라때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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