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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월탄 박종화의 글

by 竹溪(죽계) 2006.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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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명 개벽 신간 제2호 

호수 신간 제2호 

발행년월일 1934-12-01

기사제목 過鷺湖弔六臣墓 

필자 月灘(박종화) 

기사형태 문예기타 

 

 

始興郡 北面 本洞里 鷺梁津驛에서 東으로 半里許를 걸으면 과이 높지 않이한 東麓에 死六臣의 墓가 南向하야 잇스니 뒤으론 漢江이 滾滾이 흘으고 앞에는 京仁街道의 新作路가 가로 놓여 잇다. 李朝 第6대 大王 端宗이 父王 文宗의 뒤를 이어 壬申에 王位에 올으니 時에 春秋-겨우 12라. 癸酉에 文宗의 바로 다음 아우요 端宗의 叔父인 首陽大君 (뒤의 世祖)은 野心이 勃勃하야 먼저 天下의 兵馬權을 쥐고 領相의 자리를 차지하랴 하야 고명을 바든 大臣 皇甫仁, 金宗瑞가 安平大君 *과 가만히 結托하야 不軌를 꾀하얏다 하고 金宗瑞를 私第로 차저 訪問하는 체 하고 力土를 식혀 머리를 치고 皇甫仁을 闕門에서 打殺하며 端宗을 핍박하야 平安에게 死刑을 나리게 하니 金宗瑞는 범가튼 將帥의 풍도가 잇는 大臣이오 安平은 文宗의 三弟요 首陽의 다음 아우로 當時에 文章名筆의 聲譽가 높고 性情이 豪放不*하야 首陽이 가장 끄리는 敵手이엿다.

 

이러케 畏敬하는 人物을 없새버린 首陽은 스사로 領議政의 자리와 兵馬權을 잡은 지 3年 乙亥에 맟임내 王位를 纂奪하야 大王이 되고 端宗으로써 上王을 삼어 壽康宮에 왼기니 (今 昌慶苑)써 사람의 耳目을 가리려 함이오 明나라의 갑섭을 두려워 함이엿다. 그러나 宗室의 물의 엇지 가만 햇스랴 그의 庶兄 和義君瓔을 모함하야 귀양 보내고 다섯재 아우 錦城大君 瑜를 朔寧에〈14〉 追放하야 버리엿다. 翌年 丙子六月에 明나라 使臣이 太平館(接伴所)에 들거늘 이때를 機會하야 三代의 恩寵 ( 世宗, 文宗, 端宗)을 깊이 바든 승지 成三問, 叅判 朴彭年, 叅判 河緯地 直提 李塏, 將軍 兪應孚, 司藝 柳誠源, 摠管 成勝 (三問父) 端宗 舅 權自愼, 別雲劍 朴埥, 司藝 金礩 等이 上王의 復辟을 꾀하다가 不幸이 金礩의 變心告變으로 因하야 謀事가 綻露되니 六臣 ( 成三問, 朴彭年, 李塏, 河緯地, 兪應孚, 柳誠源) ( 柳誠源은 自刎死)은 極刑에 處한 뒤 漢江南岸 새남터에 誅戮을 當하고 子孽을 滅하얏다. 다행이 朴彭年의 아들 珣의 妻 태기 잇서 아들을 낳코 朴氏의 婢子-또한 아이 잇서 딸을 낳으니 忠婢-가만이 밧구어 길럿나니 나종에 그의 일홈이 곳 壹珊이라 지금도 朴氏의 子孫만은 繼繼承承한다고 傳한다. 이 일이 잇슨 뒤 6月에 임이 地下에 게신 端宗母后 顯德王后 權氏를 廢하고 朔寧에 두엇든 錦城大君을 다시 順興으로 安置하고 가을 7月에 端宗王은 魯山君이란 기막힌 이름으로 深山窮谷 寧越 西江 淸冷浦에 安置케 되니 崎劶�하다 어린 인군의 草草한 行色이여. 사람이요 뉘 능히 義憤의 쓰린 눈물을 마시지 않이 하얏스랴. 저 有名한 『千萬 머나먼 길에 고은 님 여희압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엇스니 뎌 물도 내 안 갓도다. 울어 밤길 예 노고야』란 노래는 當時 禁府都事가 上王을 寧越에 모시여 둔 후 발을 도리키려 하나 참아 떠나지 못하야 여울건너 언덕에 주저 앉어 心思를 하소연 한 것이오.

 

『月欲低蜀魂啼하니 含愁情倚樓頭라 爾啼悲我聞苦하니 無爾聲이면 無我愁랏다. 寄語世上苦*人하노니 愼莫登春三月子規樓를 하여라』는 九重宮闕에 金枝玉葉으로 生長튼 幼主 端宗이 千里 窮谷에 의지할 바이 없고 觸物傷心 애끈이는 졍경뿐이라 글字마다 뜨거운 눈물이요〈15〉 句句마다 피끌는 탄식이다.

 

이듬해 丁丑에 順興에 安置된 錦城大君 瑜는 府使 李甫欽으로 더부러 맛날 때마다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려 다시 魯山의 復位를 꾀하야 寧陽尉 鄭悰 (端宗 妹夫)과 漢南君 * (首陽 庶弟)와 永豐君 瑔(* 同腹弟 惠嬪 楊氏 出 朴彭年의 女婿)을 通하고 南中豪傑을 結托하야 順興의 군사를 出動식이고 檄文을 發하야 「天子以令諸侯하니 郭敢不從이리오」하야 將次 復辟의 運動을 일으켜 山河를 움지기려 할 때 順興府 及+唱과 錦城宮婢의 눈마짐이 大勢를 그르처 일을 綻露식이니 슬푸다. 首陽은 다시 또 한번 그 아우 錦城을 죽이고 瓔을 죽이고 *를 죽이고 瑔을 죽이고 庶母 (*瑔의 어머이요 端宗을 젓먹여 길은 惠嬪 梁氏를 죽이지 안이치 못하게 되엿스니 10月24日에 가서는 듸듸여 神人이 共怒할 萬苦의 큰 罪를 犯하야 禁府都事 王邦衍으로 藥을 밧쳐 魯山께 보내니 때에 春秋-겨우 17이라. 사람으로써 할 바이랴. 책을 덥고 붓을 멈춤이 可하다.

말끗은 다시 丙子로 옮아가 새남터에 六臣이 行刑을 당한 후에 梅月堂 金時習이 중의 모양으로 밤을 타 屍體를 업어 날러 南麓에 무더두고 드러내여 일홈을 表할 수 없음에 朴氏之墓 兪氏之墓 李氏之墓 成氏之墓라 하야 婦人의 무덤처럼 標石을 해 두엇다. 墓下道路邊에 별로히 碑碣이 잇스니 正祖대 李徽之가 王命을 바더 撰한 바이다. 그 碑文中에 『噫惟玆五墓旣表以朴兪李成姓氏 則其爲六臣中四公無疑又有一成氏此則成公之父勝同時被禍葬此云而河公墓在嶺南善山只藏一體柳公墓則擉不聞所在』라 하고〈16〉

 

芝峯類說엔 『路梁南三墓幷 人傳爲六臣墓而俱有標石 題曰成氏之墓朴氏之墓兪氏之墓許荷谷 篈言婦人稱氏而今三墓並列非婦人明矣男子必有官稱而今只稱氏豈當時義士收 瘞三人於此而不敢顯刻以是稱之耶其爲成三問朴彭年兪應孚之墓無疑云.

 

『壬辰變后人有訪之者刻石無恙而字畫漫滅殆不可辨惜哉』라 하얏고

京城府史에 보면 『建碑當時と燃藜室記述時代とには何れも五墓とあり, 芝峯類說時代には三墓とあるが現在は四墓殘存してろる』라 하얏다.

그러나 내 實地로 叅拜踏査해 보니 南麓東으로 붙어 蓮葉을 아로색인 標石에 朴氏之墓가 잇고 4,5尺을 새이하야 앞으로 좀 처져서 兪氏之墓가 잇고 또 그 만큼한 距離에 다시 朴氏와 同列로 李氏之墓가 잇서 세 분 상이 한 도국 안에 잇고 다음은 7,8步 나아가 西便으로 따로히 入首된 곳에 成氏之墓가 잇스며 다시 훨신 네려가서 西南便으로 이 山길을 上下하는 小路前面에 무덤도 없는 덤불 우에 規模와 形象과 彫刻이 똑같은 蓮葉標石이 서서 잇스나 字劃이라고는 흔젹조차 차질길 茫然하니 이것이 燃藜室記述과 正廟建碑 當時에 記錄되여 잇는 又一成氏之墓 곳 成勝의 무덤자리니 않인가. 風磨雨洗하야 碑面은 삭어지고 무덤은 문어져 없어짐이 않인지. 자못 疑訝하다. 뜻 잇는 이 잇거든 살피여 보기를 바란다. 지금 朴氏의 遺孫으로 魯字行列 단 이가 中學洞근처에 살며 間或 省楸도 하러 단인다 한다.〈17〉


大朝鮮 六忠臣께 一布衣 뵙나이다.

울어러 재배하고 네분무덤 둘너뵈니

말슴곳 게시온양 고개졀로 숙어지네.


발벗고 머리풀고 수레타신 그때 일이

새남터 白沙場에 피뿌리신 그때 일이

비바람 몃春秋완데 가슴사믓 설레오.


魯山 가오신 후 魂이라도 뫼시엿소.

하눌에 뻐치신 恨을 地府에나 펴보섯소〈18〉

百代의 後生이엿만 주먹쥐어 떱내다.


五百해 큰살림도 박귄지 오래거니

四百年 옛風波를 무러무삼 *오릿가

다만지 거두어준 이 梅月堂이 분명하오?

푸른江 길이 흘러 목메는듯 울음울고

언덕은 천길인데 갈때풀만 어지러위

山젹젹 달밝은 밤에 엇지하노 여섯혼.

歲甲戍秋九月重陽后旬四.〈1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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