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사육신관련/유응부

사육신유응부 태천집 기록(민인백)

竹溪(죽계) 2006. 9. 1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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苔泉集卷四 驪興閔仁伯著 摭言

 

[死六臣墓] 


1. 번역문

 

경태  병자년(丙子, 世祖2, 1456)에  육신들은 상왕(단종)의 복위를 모의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그릇되어 육신들이 주살되었음을 알게되었다. 당일 친지들은 그들과의 연좌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야반에 성상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 등 여러분의 시신을 수습하고  동작동 한강 남쪽 기슭에 무덤을 써서 장례를 치른 사람이 있었다.   비석을 세워 그것을 표지하기를 “모씨 모씨의 묘” 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남아있다.  생각건대 (그렇게 했던 사람은) 필시 충의지사로서  충신의 시신들이 차마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 것을 볼수 없어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었을 것이다. 더욱이 후세의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까 두려워하여  비석에다 새겨서 표지를 한 것이리라.

 

 하늘의 바른 도리가 없어지지 않음을 가히 볼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올바른 마음으로 생각해보면 역시 슬픈일이다. 무엇보다도 깊이 한스러운 것은 그 후로 의사(義士)들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120년이 지나도록   무덤에 흙을 북돋우고 비석을 세워서, 그들의 충의를   드러내어 다시는 찬양(讚揚)하지 않고 있다.  몹시 애석하게 여겨지는 일이 어찌 아니겠는가!


『태천집(苔泉集)』 4권  척언(摭言)

 

2. 원문

 

景泰丙子。六臣等謀復上王。事覺被誅。當日親知。畏其緣坐。無人收葬。一日夜半。有人收成三問,朴彭年,兪應孚,柳誠源等諸人尸。瘞于銅雀江南岸。立石以標之曰。某氏某氏之墓。至今猶在。想必忠義之士。不忍忠骸之暴露。而收瘞之。又恐後世無人知者。刻石以識之。

 

其天理之不可泯者可見。而其人之心事。亦可悲矣。深恨厥後無義士。至今一百二十年。不復爲封植而表揚之。寧不爲之痛惜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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