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의 문장 용재총화기록
용재총화 제2권
○ 세종(世宗)께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사(文士)로서 이름 있는 사람 20명을 뽑아 경연관(經筵官)을 겸하게 하고는 모든 문한(文翰)의 일을 모두 여기에다 맡겼다. 일찍 집무하여 늦게야 파하였고, 일관(日官)이 때를 알려야만 비로소 퇴근하였다. 아침저녁의 식사 때에는 내관(內官)을 대객(對客)으로 삼았으니, 신하를 두텁게 대우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서로 다투어 권면하여 재주가 크고 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나왔다. 정하동(鄭河東)·정봉원(鄭蓬原)·최영성(崔寧城)·이연성(李延城)·신고령(申高靈)·서달성(徐達城)·강진산(姜晉山)·양(兩) 이양성(李陽城)·양(兩) 성하산(成夏山)·김복창(金福昌)·임서하(任西河)·노선성(盧宣城)·이광성(李廣城)·홍익성(洪益城)·이연안(李延安)·양남원(梁南原)과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 같은 이는 모두 걸출한 사람들이었고, 그 나머지 문원(文苑)에서 유명한 이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병자년의 난에 세조(世祖)께서 집현전을 파하시고는 문신 수십 명을 뽑아 겸예문(兼藝文)이라 하여 나날이 만나 생각한 바를 의논하더니 성묘(成廟)께서 즉위하시자 집현전에 의거하여 다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였고, 또 본관(本官)으로써 경연관을 겸하게 하여 대우하기를 더욱 두텁게 하였다. 매양 궁중에서 빚은 술을 내렸고, 또 승정원(承政院)을 불러모아 승지(承旨)로 하여금 대음(對飮)하게 하였으며, 용산강(龍山江) 가에 당(堂)을 지어놓고 관관(館官)에게 번(番)을 나누어 독서하게 하였다. 또 상사(上巳)·중추(中秋)·중양(重陽)의 가절에는 교외에서 놀게 하였고, 후히 주악(酒樂)을 내렸으니, 그 총애와 영광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문명(文名)이 있는 것으로 말하면 이는 세종조의 번성하던 때와는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