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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승정원일기고종 28년 기록

竹溪(죽계) 2006. 9. 11.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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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8년 신묘(1891, 광서 17)  6월 4일(병신) 맑음 


 좌목 


생육신 가운데 조려 등을 영월 차얼사에 추가하여 배향할 것을 청하는 경상도 유생인 진사 유응목 등의 상소


○ 경상도 유생인 진사 유응목(柳膺睦)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하가 절개를 바치는 것이 죽고 사는 것은 비록 다르지만 그 마음은 같고, 국가가 어진 이를 기리는 것이 앞에 하고 뒤에 하는 것이 더러 차이가 있지만 그 법은 한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은(殷) 나라의 세 어진 이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였지만 공자는 아울러 칭찬하였고,송(宋) 나라가 어진 이를 제사한 것이 앞에 하기도 하고 뒤에 하기도 하였지만 이종(理宗)은 모두 거행하였던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열성조(列聖朝)가 충성한 자를 기리고 절개 있는 자를 장려한 것이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유독 영월부(寧越府) 창절사(彰節祠)에 배향하는 예에 있어서는 오히려 아직까지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점이 신들이 처음에는 의심스럽게 여기다가 끝내는 개탄스럽게 여기고 이어서 오늘 사정을 말하며 간청하는 거조(擧措)가 있게 된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밝게 살피시고 헤아려주소서.

단종(端宗)이 왕위를 내놓던 날에 절개를 굽히지 않고 의리에 죽은 신하들을 세상 사람들은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이라고 일컫습니다.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이 여섯 신하가 바로 사육신이고,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 정간공(靖簡公) 이맹전(李孟專), 정숙공(貞肅公) 성담수(成聃壽), 정간공(貞簡公) 원호(元昊), 청간공(淸簡公) 김시습(金時習), 문청공(文淸公) 남효온(南孝溫), 이 여섯 신하가 바로 생육신입니다.

조려는 세상과 단절하여 종적을 감추고서 고비와 고사리에다가 자신의 뜻을 부쳤고, 이맹전은 종신토록 장님이라 핑계 대고서 자신의 뜻을 바꾸지 않았고, 성담수는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사절하고서 낚시하며 종적을 감추었고, 원호는 가족을 데리고 동쪽 영월(寧越)로 떠나 눈물을 흘리며 삼년상을 치렀고, 김시습은 미친 척하며 자신을 감추었고, 남효온은 비분강개하면서 삶을 마쳤는데, 모두 천고(千古)에 뛰어난 절개라고 하기에 충분합니다. 신들이 삼가 노릉(魯陵)의 사실을 보니, ‘죽음을 맹서한 동지들과 자규루(子規樓)에서 모이기로 기필한 자는 조려이고, 영월을 향해 면벽(面壁)하고서 날마다 아침 해에 절한 자는 이맹전이고, 앉을 때나 누울 때나 반드시 동쪽을 향하고 마음을 영월의 하늘로 기울인 자는 원호이고, 영월을 그리워하여 꿈속에서 흰 기러기와 난 자는 성담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네 신하의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그 마음은 사육신의 마음이지만 일의 난처함은 도리어 그보다 심한 점이 있고, 그 자취는 김시습과 남효온의 자취입니다. 재적(載籍)을 상고해 보면 해와 별처럼 분명하므로 기리는 은전과 배향(配享)하는 예(禮)가 다름이 없어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창절사에 나란히 배향된 사육신의 자리에 김시습과 남효온은 이미 배향되는 은전을 입었으나, 조려, 이맹전, 원호, 성담수 네 신하는 아직도 배향하는 거조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수백 년 동안 미처 행하지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정묘(正廟) 신해년(1791, 정조 15)에 금성(錦城 이유(李瑜))과 화의(和義 이영(李瓔)) 두 종신(宗臣)을 본 사당에 추가하여 배향한 것과 관련하여 교서를 내렸는데, 그 대략(大略)에, ‘금성과 화의 이외에도 사육신 못지 않은 자들이 많이 있으니, 지금 추가하여 배향할 때 일체 시행하라.’ 하였으니, 실로 조정에서 기리고 장려하는 은전에 부합됩니다. 즉시 내각(內閣)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널리 공사(公私)의 문적(文籍)을 상고하도록 하소서.

또 생육신전(生六臣傳)을 짓도록 명한 것과 관련하여 특별히 전교를 내렸는데, 그 대략에, ‘생육신과 오종영(五宗英)의 높은 충성과 큰 절개는 모두 비슷하여 배향하거나 하지 않는 즈음에 쉽게 취하고 버릴 수 없는 점이 있으니, 특별히 예(禮)에는 없지만 예에 부합되는 예를 구하여 행하는 것도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하교하기를, ‘예는 정(情)에서 기연(機緣)하는 것이어서 귀신과 사람이 차이가 없다. 저 울분이 가시지 않은 열렬(烈烈)한 영령으로 하여금 영원히 귀의할 곳이 있게 할 뿐만이 아니라, 공손히 생각건대 장릉(莊陵)에 오르내리는 신령도 반드시 분향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니, 이 거조에 대해 누가 상고할 길이 없다고 하는가.’ 하였습니다. 또 금성대군(錦城大君)에 대한 사제문(賜祭文)에, ‘《노릉지(魯陵誌)》를 읽고서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생육신과 사육신은 신하로서 직분을 다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순묘(純廟) 갑오년(1834, 순조 34)에 예조가 유학 서상열(徐相說) 등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회계(回啓)하였는데, 그 대략에 ‘생육신인 이맹전, 조려, 원호, 성담수 등을 창절사에 추가하여 배향하는 일에 있어, 네 사람의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사육신과 모두 비슷합니다. 혹은 산 것과 죽은 것이 비록 시세(時勢)의 차이는 있더라도 그 기리고 권장함에 있어서는 피차의 구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뜻을 같이한 여섯 사람 가운데 김시습과 남효온은 이미 배향되는 은전을 입었으나 이 네 신하는 함께 배향되지 못하였으니, 다만 모든 사람을 한결같이 대우하는 조정의 정사에 흠결이 될 뿐만 아니라 많은 선비와 공공(公共)의 의론이 답답하게 여기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더구나 네 신하는 일생 동안 오직 영월의 산천을 그리워하는 마음뿐이었으니, 울분이 가시지 않은 영령 또한 반드시 창오(蒼梧)의 주구(珠邱)에서 오르락내리락할 것입니다. 군신이 일체가 되는 창절사에 이미 뜻을 같이한 사육신과 함께 배향되지 못하였고, 또한 절개를 같이한 두 신하와도 함께 배향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다만 지사(志士)가 한을 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조정의 흠전(欠典)이 되는 것입니다.

신들은 매양 정종 대왕(正宗大王)의 추가하여 배향하라는 하교를 삼가 읽다가 ‘열렬한 영령이 영원히 귀의할 곳이 있어야 한다. 장릉(莊陵)에 오르내리는 신령 또한 반드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는 등의 구절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되풀이하여 읽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유독 애달픈 것은 절개를 같이한 네 신하의 혼령이 장릉의 하늘 가까이에서 배회하면서 귀의할 곳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한맺힌 답답함이 모두 풀려야 한다는 밝으신 성상의 특명이 있어 이에 감히 천리 먼 길을 발을 싸매고 와서 연명으로 성상께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리시어 생육신 가운데 조려, 이맹전, 원호, 성담수 등 미처 배향되지 않은 네 신하를 즉시 영월 창절사에 추가하여 배향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위로는 조정의 미처 행하지 못한 은전을 이루시고 아래로는 백세(百世)토록 한결같은 의론을 따라 충절(忠節)을 기림으로써 풍속을 바로 세우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한목소리로 의론하는 것은 혹시 그럴 수 있으나 추가로 배향하는 문제는 또한 신중히 해야 할 것이니, 그대들은 양해하고 물러가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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