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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에 나타난 근친상간

竹溪(죽계) 2005. 12. 18.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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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상간의 아픔을 아름답게 다룬 영화 ‘피아니스트’


퍼니게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를 올바르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숨겨진 모티프를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미가 없도록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피아니스트인 것이다.

 

이것이 이 영화가 가진 특징이요 영화 보는 재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피아니스트는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피아니스트가 된 주인공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속박과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그것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아버지가 딸을 성폭행했다는 내용이나 말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스스로 그것을 찾아내서 즐겨야 한다.


영화는 줄거리가 거의 없다. 피아니스트이며 교수인 여주인공은 강의와 레슨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인데, 연주회에서 만난 젊은 남학생과 짧고 이상한 사랑을 나누다가 헤어진다는 것이 전부다.

 

장대한 스케일도, 어마 어마한 역사적 진실도, 미래를 걱정하는 어떤 메시지도, 우주에 대한 장미빛 미래도 이 영화에는 없다.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가련한 딸과 어머니만이 있을 뿐이다.

 

감독은 이 두 여인의 삶에 주목하며 끝까지 이 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한 남성의 성폭행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성폭행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이 영화를 보면 성에 대해서 변태적인 태도를 보이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어설픈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되고 만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 한마디로 등장하는 아버지를 중심에 갖다 놓고 보면 영화 속에서 하는 두 여인의 행동이 저절로 이해되고, 영화를 보는 재미는 몇 배가 된다. 영화에서 아버지에 대한 것은 오직 한마디뿐이다. 어머니가 딸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 말에 대해서 주인공인 딸은 아무 반응이 없다. 이것이 아버지에 대해 영화에서 말하는 전부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끝날 때 까지 한 순간도 관여하지 않는 적이 없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아버지는 딸과 어머니의 삶을 재단하고 있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의 행위가 딸의 삶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딸이 하는 모든 행위는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당했던 행위를 그대로 재현하며 성폭행으로 인한 상처와 구속이 삶의 전부가 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아버지가 자신에게 강요하고 요구했으며 행동했던 것들이다.


이제 영화를 따라가면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주인공이 피아노 레슨을 할 때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어두운 실내의 창가에 서서 지나칠 정도로 환한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영혼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피아노로 돌아오면 절도에 맞는 현실만이 존재한다. 악보대로 치라는 주문을 수 없이 해대는 주인공의 행동은 사람을 질리게 할 만큼 차갑기만 하다.

 

그렇다면 감독은 주인공의 이런 이중성을 나타내는 도구로 왜 피아노를 택했을까? 그것은 이렇게 해석된다. 피아노는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이 함께 하면서 그것이 번갈아 소리를 내어서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바로 주인공이 가진 심리상태와 현실상황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피아노의 소리를 통해서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그녀의 생활은 피아노 레슨과 강의 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절제된 구속의 삶과 모든 것에서 풀려나 자유롭고 싶은 갈망이 중심을 이루는 변태적인 삶으로 나누어진다. 이런 분열을 초래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의 성폭행이다.


피아노와 관계되는 레슨이나 강의, 그리고 연주회 등에서 그녀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상적인 인물이며 냉철하고 이지적인 여성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면 남들이 볼 때 결코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변태적인 인물이 된다.

 

목욕탕에서 면도칼로 자신의 음부에 상처를 내어 피를 본다든지(이것은 성폭행 당할 당시의 아픔을 재현한 것이다), 포르노 감상실에 들어가서 음란한 비디오를 본다든지, 자동차 극장을 돌아다니면서 차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를 훔쳐보다가 그 옆에 앉아서 오줌을 싼다든지 하는 행위들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정상으로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비정상적인 행위는 사랑을 고백하는 청년 학생에게서 더욱 구체화된다. 비로소 감독은 주인공이 하는 행위가 아버지에게서 성폭행 당할 때 강요받았던 행위였다는 사실을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한다.

 

레슨을 하는 학교의 강의실에서도 성행위를 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남자에게 편지를 써주고 그것을 읽은 다음 자신에게 오라고 한다. 편지를 읽지도 않고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남자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서 그 편지를 읽게 하면서 그녀가 하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편지에는 자신을 줄로 묶고 채찍으로 때리면서 자신이 남자에게 완전히 복종할 수 있도록 이상한 행위를 요구해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옆방에 있는 어머니에게는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한다.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자 밑에 감추어 두었던 이상한 도구들을 꺼내 남자에게 보여주니 남자는 아연실색하여 주인공을 이상한 여자라 힐책을 하고 사라진다.

 

체육관에서 있었던 이상한 행위 뒤에 집으로 찾아온 남자와 함께 문을 걸어잠그고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은 거실로 나간  뒤 급기야는 남자의 폭력과 성폭행에 가까운 성행위를 하고 헤어진다. 이 장면이 바로 아버지가 딸에게 한 행위를 재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집에서, 그것도 옆에 어머니가 있는 데서 성폭행을 당했으며, 그것을 어머니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어머니는 옆방에 감금당해서 딸이 당하는 것을 영화에서 나타나는 그 상태로 관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자가 어머니를 방에 가두고 거실에서 딸에게 성폭행하는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성폭행의 피해자는 딸 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두 사람 다 정상이 아닌 것이다. 딸이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어머니는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 남성의 무지한 행위로 인한 두 모녀의 처참한 일생을 이 영화는 매우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학교에서 있는 연주회장 입구에서 만남 남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 있다. 교수님의 연주를 너무 듣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남자는 객석으로 들어가 버린다.

 

자신이 지금까지 삶의 전부로 여기고 살아왔던 피아노로는 어떤 자유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디어 깨달은 주인공은 준비해간 칼을 꺼내 자신의 왼쪽 가슴 약간 위를 찌르고 연주회장을 떠난다.

 

피아노로 인해 두 번이나 성폭행을 당한 주인공은 어느 성폭행에서도 자유를 얻지 못한 것이다. 주인공이 칼로 찔렀던 가슴 윗부분은 손과 관계되는 부위로 그곳을 다치게 되면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영화는 마지막에서 보여준다.

 

 드디어 자신의 삶을 찾은 여주인공이 향하는 곳이 어디든 그것은 진정한 자유를 얻은 삶이 될 것은 분명하다. 이 영화를 애정물인 것처럼 선전하고 글을 쓴 사람들이여 반성할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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