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어원
짐승의 어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말 중에 ‘짐승’이란 표현이 있다. 사전적으로는 몸에 털이 나고 발은 네 개가 달린 동물을 부르는 이름이 짐승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적절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짐승이란 말은 사람이 아니면서 살아있는 모든 동물을 지칭하는 말로 길짐승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길짐승, 날짐승, 물짐승 등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을 통칭하는 말이 바로 짐승이 되는 것이다. 짐승 같은 놈, 짐승만도 못한 인간 등의 표현을 근거로 하여 야만적인 사람을 비유적으로 일컫는다고도 말하지만, 이것 역시 원래의 의미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설명이어서 현상적인 것만 강조하는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것을 순우리말이라고 하면서 이 말은 많은 사람이나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지칭하는 중생(衆生)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衆生>>즘>즘>즘승>짐승의 변천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의 표현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렇게 배웠고, 지금도 그 이론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고 곰곰이 생각해 봐도 중생이 어떻게 해서 짐승으로 변했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 너무 많다. 우리말의 짐승에 해당하는 한자어는 禽獸(금수)인데, 이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날짐승과 길짐승이라는 뜻이 되는데, 이것과 衆生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불교적인 의미를 너무 확대해석했거나 소리의 발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15세기의 문헌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등에서 ‘즁ᄉᆡᆼ’으로 표기한 것을 불교에서 말하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 혹은 뭇 생명체를 가리키는 衆生(중생)이란 한자어와 동일시하려는 과정에서 이런 추론이 생겨났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문헌 자료를 보도록 하자.
뒤헤 모딘 알 기픈 모새 열 어르믈 하히 구티시니.(後有猛獸 前有深淵 有薄之氷 天爲之堅)→뒤에는 사나운 짐승 앞에는 깊은 못에 얇은 얼음을 하늘이 굳히셨습니다.<<용비어천가 30장>>
雜 숨 마아호 노면 어려 厄 버서나며 모딘 귓거슬 아니 자피리라. →잡 살아 움직이는 중생 마흔아홉을 놓으면 어려운 액을 벗어나며 모진 귀신에게 아니 잡히리라. <<석보상절 9:32~33>>
비록 사라 무레 사니고도 마도 몯호다. → 비록 사람의 무리에 살더라도 짐승만도 못합니다. <<석보상절 6:5>>
위 자료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즁ᄉᆡᆼ’이란 말은 지금의 짐승이란 뜻으로만 쓰였지 불교에서 말하는 衆生을 우리말로 표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衆生을 ‘즁ᄉᆡᆼ’으로 표기한 경우는 다른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용비어천가에서는 사나운 짐승을 지칭하는 한자어인 猛獸(맹수)를 이렇게 해석했고, 석보상절에서도 ‘즁ᄉᆡᆼ’이라고 한 것은 어떻게 해도 衆生(중생)의 우리말 표기로 보기 어렵다. ‘ㆍ’를 단순하게 ‘ㅏ’로 보아 당시의 ‘ᄉᆡᆼ’이 지금의 ‘생’으로 발음되었을 것으로 판단하는 바람에 짐승이 衆生에서 왔다고 한 것인데, ‘ㆍ’가 반드시 ‘ㅏ’로만 발음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연구된 바에 의하면, ‘ㆍ’는 ‘ㅏ’(주로 첫째 음절)와 ‘ㅡ’(주로 둘째 음절 이후) 등으로 발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ㆍ’는 주로 첫째 음절에서는 ‘ㅏ’로 되고, 둘째 음절 이하에서는 ‘ㅡ’로 발음되고 변화되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즁ᄉᆡᆼ’에서 ‘ᄉᆡᆼ’의 발음을 ‘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ㆍ’의 본래 발음은 ‘ㅣ’와 ‘ㅡ’의 합성음이라는 주장도 있다(주시경). 훈민정음에서는 ‘ㅣ’와 ‘ㅏ’의 합성음을 ‘ㅑ’로 만든 것처럼 두 개의 모음이 합쳐서 새로운 모음을 만들었는데, ‘ㅡ’와 ‘ㅣ’의 합성음을 ‘ㆍ’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보면 ‘ᄉᆡᆼ’은 ‘싕’으로 발음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커서 ‘승’으로 변화하는 데에 어떤 장애도 없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중생과 짐승을 연결시킨 것은 그렇게 하려는 사람의 마음에 이미 자리하고 있는 중생이란 말에 대한 선입견과 그것의 발음이 조선시대 중세어 표기로 ‘즁ᄉᆡᆼ(지금의 중생)’이라고 착각하는 바람에 생긴 촌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짐승이 중생에서 왔다는 것은 억지 주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즁ᄉᆡᆼ, 혹은 짐승이란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15세기 문헌에 이미 지금 우리가 쓰는 짐승이란 말의 뜻과 같은 것으로 ‘즁ᄉᆡᆼ’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말은 15세기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우리 민족의 언어생활 속에 깊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5세기 이전부터 현재 쓰고 있는 짐승이란 말의 뜻으로 ‘즁ᄉᆡᆼ’이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불교에서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지칭하는 중생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한정된 의미를 가진 표현으로 출발했다는 것이 된다. 즉, 이 ‘즁ᄉᆡᆼ’이란 말은 애초에 생길 때부터 지금의 짐승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확대되거나 축소된 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된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지금의 짐승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말로 ‘즁ᄉᆡᆼ’이란 표현이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말의 발달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외래 언어를 든다면 한자를 으뜸으로 꼽아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즁ᄉᆡᆼ 혹은 짐승이란 표현의 어원 역시 한자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게 된다. 우리말의 짐승과 같은 뜻을 가지는 한자어로는 禽獸(금수)를 들 수 있는데, 맹자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초목이 우거지고 짐승은 번식하니, 곡식은 자라지 못하고 짐승은 사람을 핍박한다.-草木暢茂 禽獸繁殖 五穀不登 禽獸逼人《孟子, 滕文公上》”이 그것인데, 살아 있는 동물이면서 사람을 위협하거나 위협할 가능성이 큰 존재들을 이렇게 지칭하고 있다. 금수는 결코 좋은 뜻으로 쓰인 말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어서 우리가 쓰고 있는 짐승과 비슷한 의미라는 사실 또한 쉽게 간파할 수 있을 정도다. 맹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모와 군주가 없는 사람도 금수(無父無君 是禽獸也)라고 했다. 사람이지만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존재도 금수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인두겁을 쓰고 있지만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짐승이라고 하는 것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뜻이 비슷하다고 해서 짐승이 禽獸(금수)에서 왔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로 인해 禽獸가 우리말로 ‘즁ᄉᆡᆼ’, 혹은 짐승으로 표기하게 되었느냐를 전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짐승이 한자어에서 왔을 가능성은 금수의 중국어 발음에서 찾을 수 있다. 衆生(중생)의 중국어 발음은 ‘중스엉’, ‘중셩’에 가까운 소리로 들리고, 禽獸는 ‘진승’, ‘진숑’, ‘진숭’, ‘진쇼우’ 등에 가깝도록 들린다. 중국어는 지역에 따라 발음하는 소리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지금의 ‘짐승(진승)’에 가깝도록 들리는 것도 있다. 또한 중국어 발음에서 받침에 ‘ㅇ’은 분명하게 있지만 ‘ㄴ’과 ‘ㅁ’은 없으므로 이 세 가지가 중세어에서는 모두 ‘ㅇ’으로 표기된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禽’은 우리말에서 ‘진(친)’, ‘즈(츠)인’, ‘짐’, ‘징’, ‘증’ 중 어느 것으로 표기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것으로 되어 한국어의 발음 관습에 따라 표기될 수밖에 없다. ‘衆’은 누가 들어도 ‘중’으로만 들리기 때문에 그냥 ‘중’으로 될 수밖에 없다. ‘生’은 ‘성’, ‘셩’ 등으로 들리기 때문에 굳이 ‘ᄉᆡᆼ’이나 ‘승’으로 표기할 이유가 없다.
한편, ‘獸’는 ‘승’, ‘슝’, ‘쇼우’, ‘스(수)이’, ‘스ㅇ’ 등으로 들리기 때문에 이 중에 무엇으로 표기해도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특히 중국은 지방에 따라 글자의 쓰임과 소리 등이 매우 다양하므로 이보다 더 큰 폭의 소리 변동이 있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관계로 뜻이 가장 가까운 禽獸라는 한자어의 중국 발음을 가져와서 우리말식으로 바꾸어서 썼을 가능성을 점칠 수 있게 되는데, 위에서 살펴본 15세기의 여러 문헌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5세기 문헌에서 ‘즁ᄉᆡᆼ’이라고 표기한 것은 ‘중싕(중승)’으로 발음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큰데, 즁ᄉᆡᆼ(싕)>중ᄉᆡᆼ>즘>즘승>짐승의 변화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