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이의 어원
사나이의 유래와 어원
‘사나이’라는 표현에 대해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한창 혈기가 왕성할 때의 남자를 지칭하는 말”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에 올라온 어원을 보면, ‘사나이’는 ‘ᄉᆞᆫ’과 ‘아해’가 결합한 것으로 ‘산’은 장정(壯丁)이란 뜻으로 건장한 남자라고 풀이하여 건장한 남자와 아이가 결합해서 된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1527년에 발행된 훈몽자회(訓蒙字會)를 필두로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다른 몇 개의 문헌에서 ‘丁’을 ᄉᆞᆫ 뎡이라고 하고 있으니 꽤 오래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ᄉᆞᆫ’이라는 말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두세 개의 문헌에만 나타날 뿐 다른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하고 사라졌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즉, ‘ᄉᆞᆫ’을 장정이라는 한자어로 해석한다는 것이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장정이란 말은, 나라에서 부과하는 노역이나 군역에 나갈 나이가 된 남자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우리말로 왜 ‘ᄉᆞᆫ’이었는지를 밝혀야만 이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주장에 따르면, ‘사나이’는 ‘ + 아’로 시작하여 ‘나/나희’를 거쳐 ‘ᄉᆞ나히’로 되었다가 오늘날의 ‘사나이’로 변화한 것이 된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기록에 사나이의 어원을 말해주는 문헌이 있어서 눈길을 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충혜왕(忠惠王) 조에, “왕이 복위한 지 2년째가 되던 해인 1341년에 첨의평리(僉議評理) 벼슬을 한 이나해(李那海)가 세상을 떠났다. 이나해는 인물이 매우 잘 생겼는데, 마음도 그 외모와 같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나해의 본관은 양성(陽城-지금의 경기도 안성)이며, 처음 이름은 이수방(李守邦)으로, 양성군 이천(陽城君 李梃)의 아들이다. 왕을 따라 원나라에 입조했는데, 그 나라 왕의 총애를 받아서 이나해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고려로 돌아온 후에는 직성사인(直省舍人)과 첨의평리(僉議評理) 벼슬을 지냈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나해는 아들을 네 명 두었는데, 모두 크게 출세해서 재상(宰相)이라는 높은 관직을 지냈다. 네 아들의 이름은 원부(元富), 광부(光富), 인부(仁富), 춘부(春富)로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나해를 부러워하고 존경해서 아들을 낳으면 모두 이나해와 같거나 비슷해지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아들은 모두 나해와 비슷해지라는 뜻을 가진 사나해(似那海), 혹은 나해를 그리워하고 소망한다는 뜻을 가진 사나해(思那海)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유행어처럼 되어서 나중에는 남자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1800년대의 문헌 세 개에 등장하는데, 이재유고(頤齋遺藁)와 임하필기(林下筆記), 송남잡지(松南雜識) 등이 그것이다.
고려시대의 인물과 관련성을 가지는 말이 그리 오래도록 내려오다가 조선 말기에 와서야 기록되었다는 점과 어휘의 형태소 변화로 보았을 때는 신빙성이 없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구전되어왔던 이야기가 있었고, 그것이 실재했던 인물과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는 만큼 그냥 엉터리로만 치부해버릴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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