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죽었다
진보는 죽었다
뉴제주일보 승인 2023.05.30 19:50
손종흠 전 한국방송대 제주지역대학장·논설위원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라는 두 진영의 대립으로 인해 생기는 다양한 형태의 갈등에 직면해 있다. 정치권에서 시작된 진영 간의 대립과 갈등은 점차 확산돼 국민 전체가 둘로 쪼개지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으며 감정적이고 비상식적인 언행이 난무하다 보니 중도와 화합 같은 말은 누구 하나 입에 담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대로 간다면 결국 우리나라는 정상적으로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거짓과 불공정,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사회지도층과 이기적이면서도 도덕적 불감증에 빠진 사람들이 국가의 존립 자체를 통째로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도록 핵심적인 원인을 제공함과 동시에 커다란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는 진보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이념과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진보라 일컬으며 우리 모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대다수 국민은 진보만이 우리 민족의 희망이라 생각했다. 사익보다는 공익을, 개인보다는 사회를, 자신보다는 상대방을 우선시하면서 평등과 공정, 청렴이라는 강한 도덕성을 진보의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독재와 군부정권을 향해 자유와 민주를 외치며 거리에서 싸우는 그들을 보면서 진심으로 응원했고 최루탄을 뒤집어쓰고 건물 안으로 숨어들어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보호해주었다. 그런 민심을 등에 업고 싸웠기 때문에 그들은 외롭지 않았으며 더욱 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룩한 민주주의였기에 그들의 업적은 소중했으며 존중받을 가치가 있었다. 진보는 암울한 시대를 이겨내고 민주화를 이룩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진출하여 정권을 잡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폐족(廢族)이라 진단하며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 후 탄핵 정국을 거쳐 다시 진보정권으로 교체되자 이전보다 더욱 타락하면서 뻔뻔해지더니 마침내 멸족(滅族)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의 진보는 더 이상 타락을 입에 담기가 민망할 정도로 부패했고, 철면피가 되었으며, 억지 주장만 일삼는 사람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진보는 죽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나라라도 팔아넘기는 매국(賣國)적 행태만이 남은 것이다.
지금의 진보에게는 있는 것 세 가지와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다. ‘나만’, ‘우리 편만’, ‘사심만’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고, ‘양심’, ‘공정’, ‘화합’은 없다. 내가 잘못 했을지라도 모든 원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으므로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우리 편이 아니면 타도, 혹은 말살의 대상으로 치부해 버린다. 나랏일을 하면서도 공익보다는 사익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국가의 이익이나 안위 같은 것은 아예 안중에 없다.
이렇다 보니 진보는 옳고 그름과 선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심 자체가 아예 없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도록 꾸미기만 하면 괜찮다고 우긴다. 또한 그들에게는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 같은 상황에서는 공평하고 올바르게 시작해야 하는 공정도 없다. 나, 내 가족, 내 편만이 잘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진보에게 중요한 것은 갈등과 투쟁을 통한 혼란뿐이며 그들의 DNA에는 화합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이 땅에 진보라는 세력은 처참하게 죽어 땅에 묻혀버렸고, 박제된 과거의 영광만이 낡은 비목(碑木)처럼 슬프게 서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