竹溪(죽계) 2019. 6. 6.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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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시선과 삼중의 구조가 조화를 이룬 영화, ‘기생충

기생충이란 자신의 힘으로 먹이를 구하지 않고 다른 생명체에 붙어서 양분을 빨아 먹고 사는 벌레를 지칭하는데, 이는 남에게 덧붙어서 살아가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영화를 통해 우리 민족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한반도와 그 사회를 현실보다 극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여 예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이념과 계급의 대립을 말하면서 그것을 넘어서고, 사회에 만연한 갈등의 양상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승화시키고자 하며, 민족의 비극을 직시하면서 뿌리, 혹은 근본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계급, 사회, 민족이라는 삼중의 구조가 겹겹이 쌓이고 얽혀 있어서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지만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한 겹의 구조만을 보더라도 재미가 반감되지 않으며, 세 겹의 구조를 모두 보더라도 그것대로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느꼈던 것은 재미도 있으면서 매우 사실적이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데, 이해를 할 수 없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예를 들면, 지상과 반지하와 지하라는 공간은 무엇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며, 작품 속에서 배우들이 하는 기이한 행동들은 무엇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작중 인물들이 하는 말들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지 하는 것 따위가 그것이다.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를 감상해도 충분히 여러 가지를 느끼도록 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있게 작품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이 영화는 기생과 공생의 관계를 맺고 있는 부유한 가족과 백수 가족,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또 다른 기생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사건을 잔인하리만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는 가족주의, 계급의 대립, 집단 이기주의, 민족주의, 자본주의의 본질, 이념적 갈등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혹은 사회와 민족이 처한 작금의 현실을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소름이 돋을 만큼 냉철하게 그려내고 있어 섬뜩한 감정을 안겨 준다.

 

세 겹의 구조로 되어 있는 첫 번째 장치인 계급의 문제를 먼저 살펴보자.

사회적 이해관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대립적 집단을 지칭하는 계급은 자본주의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현대에는 경제적 계급이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경제력의 차이에 의해 삶의 질과 이해관계 등이 결정되고, 그로 인해 형성되는 동질성으로 인한 계급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사회가 바로 현대사회이기 때문이다. 계급은 마주보고, 대립하면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갈등을 겪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대립과 갈등만 핵심이 아니다. 많이 가진 자와 많이 가지지 못한 자라는 두 개의 경제적 계급은 현실적 모순으로 인해 생기는 갈등으로 대립하기도 하지만, 반대편이 있어야 자신도 존재할 수 있으므로 상대의 목숨을 빼앗거나 공멸할 정도로 치명적인 대립은 상호간에 지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생충에서 그려내고 있는 계급의 문제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이념이나 대립, 갈등을 강조하거나 부추기기 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는 상황으로 그려진다. 사람다운 생활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김기택의 가족은 고정수입을 위해 IT기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박태수사장 가족의 가정교사, 미술치료사, 운전사, 가정부 등으로 전원 취업한다. 이 가족의 현실은 돈이 필요한 경제적인 이유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없다. 이념도, 분노도, 절망도, 원망도 없었으며 속임수에 가까운 전략을 쓰더라도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돈만 있으면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인데, 이 영화는 이 점에 주목하고 그것을 현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이런 상황은 상대편이라고 할 수 있는 박사장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사람들이 꾀를 써서 자신들을 속이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면서 그냥 넘어가는 것이 그들의 속성이다. 가정부인 문광이 한 끼에 2인분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렇겠지 하고 넘기기도 하고, 큰 딸인 다혜의 영어 선생님이 소개해준 사람이기 때문에 제수생인 기우를 별다른 의심 없이 집으로 맞아들이고, 그의 소개를 받아 여동생은 미술치료사, 아버지는 운전사로, 어머니는 가정부 등으로 채용한다. ‘심플하다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박사장가족의 특징은 있는 그대로 보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 가족에게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이나 측은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일 뿐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가진 집단과 가지지 못한 집단이라는 두 계급 사이에는 대립보다는 공존이, 갈등보다는 화합이 중심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조화와 평화의 상태는 오래 전부터 이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문광가족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아주 오랜 동안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사장이 이사 오기 전부터 가정부 일을 하면서 그 집을 지켜왔던 문광은 지하실에 남편을 숨겨두고 밥을 챙겨 먹이면서 4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다. 이 가족 역시 박사장가족과 아무런 갈등이 없을 뿐 아니라 지하에 있는 남편은 자신이 잘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박사장을 존경하기 까지 한다. ‘기택의 가족이 개입하면서 판을 흩트려 놓지 않았다면 문광가족은 기생충의 개념에 충실한 존재가 되어 아주 잘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기생충이지만 성격이 약간 다른 기생충인 기택의 가족이 출현하면서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 두 기생충 가족의 특징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문광가족은 실체를 절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지상과는 완전히 두절된 지하라는 공간이 숨어있으면서 삶을 유지하기 때문에 불만이나 불평 같은 것은 전혀 없이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반면에 기택가족은 지상과 연결되어 있는 반지하라는 공간에서 지상으로 올라갈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다. 이런 점에서 기택의 가족은 문광의 가족과는 성격이 좀 다른 기생충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두 가족 사이에서 대립과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해진다. 가난한 사람들까지 서로를 보듬고, 도우면서 함께 살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어설픈 꿈을 꾸는 기생충기택가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결국 두 가족은 충돌하게 되고, 파국을 맞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념과 지향점이 다른 반대 진영과의 충돌이 아니라 비슷한 성향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충돌이야말로 현실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나 만연해 있는 사회적 갈등의 구조다. 이 영화에서 사회적 갈등은 냄새, 생존의 전략과 전술, 금전 등에 의해 기인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것들은 비록 형체가 없는 것이지만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으며, 무엇에든 영향을 미치는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다. 냄새로 상징되는 사회적 갈등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데에 그 심각성이 존재한다. 반지하에 살거나 지하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고유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또한 지상에 살면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고유의 냄새를 가지고 있는데, 어느 한쪽은 다른 한쪽의 냄새를 좋아하고, 다른 한쪽은 어느 한쪽의 냄새를 싫어한다는 사실에서 갈등이 생겨난다.

박사장가족은 기택문광의 가족에게서 나는 반지하, 혹은 지하의 냄새를 극도로 싫어한다. 반대로 기택문광의 가족은 박사장의 냄새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싫어하는 것은 상대방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결국 냄새로 인해 겹겹이 쌓여왔던 감정이 한 순간에 폭발하면서 기택은 자신의 숙주인 박사장을 칼로 찔러 죽인다. 이것은 무례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자신의 고유성을 침해하고, 혐오하는 상대에 대한 응징이기 때문에 기태는 그러한 행위를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상대에 대한 호불호를 마음대로 드러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 속에서 얽히고설킨 관계를 형성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개발한 생존의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있다. 생존의 전략과 전술이 사회적으로 용인된 객관성이나 타당성을 가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정당한 것이 되기도 하고, 범죄행위가 되기도 한다. 만약 그것이 주관성과 편파성으로 얼룩진 행위로 나타날 경우 필연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략과 전술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법적인 제재(制裁)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기태가족이나 문광의 가족이 펼치는 생존의 전략과 전술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정당화될 수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엄연한 범죄행위이기 때문에 엄청난 갈등을 유발한다. 이러한 갈등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충숙문광을 발로 차서 계단 아래로 떨어뜨려 죽게 만드는 행위나 문광의 남편이 기정을 칼로 찔러 죽이는 것 등은 생존의 위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행위가 됨과 동시에 사회적 갈등을 극대화시키는 것으로 발전한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돈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것의 유혹을 벗어날 수도 없다. 기사 식당에서 한식 뷔페를 양껏 먹는 것, 양주나 와인을 마시면서 분위기를 즐기는 것, 아무리 비가와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 텐트 안에서 캠핑을 할 수 있는 것 등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하는 거의 모든 행위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돈이기 때문이다. 돈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개발하고, 실천하면서 생을 유지해나간다. 개인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확보하고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갈등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삶의 현실에서는 누군가를 쫓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가는 행동으로 구체화하는데, ‘기택의 가족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박사장의 운전사, 가정부 등을 쫓아내고 네 식구 모두가 취업을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뺏고 뺏기는 이러한 사회적 갈등은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최고의 소재가 된다.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민족적 시각과 그것을 체계화한 구조의 문제다. 이 영화는 물리적으로 지상, 반지하, 지하라는 세 개의 공간이 등장하고, 기후적인 측면에서는 비오는 날과 햇볕이 쨍한 날이 엇갈리며 등장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기우의 친구로부터 선물로 받은 산수경석(山水景石)이 있는데, 이것들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를 지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민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할 수 있겠지만,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으면서 현재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처한 현실을 돌아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1945년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나누어지면서 민족 역시 양분된 상태에서 70년을 넘게 살아오고 있다. 현재 상태로 볼 때 이것이 언제 합쳐져서 통일이 될 수 있을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치열한 무역 전쟁과 일방적 제재로 인해 남북 모두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수입과 수출로 경제를 유지하는 남쪽은 무역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샌드위치가 되어가고 있으며, 60년을 넘게 이어져온 경제봉쇄로 인해 북쪽은 기아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전제로 하여 세 개의 공간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제대로 보인다. 지상의 공간은 부자들이 사는 곳으로 국제사회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데, 미국이 대표적인 나라다. ‘박사장가족에게는 IT, 영어, 서양 미술, 인디언 캐릭터, 미제 상품 등이 중심을 이룬다. 삶의 방식과 내용에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박사장가족 역시 더 큰 세계에서 봤을 때는 기생충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의 삶은 좋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외국으로부터 공급받고 있으며, 자신은 하고 싶지 않으며,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지만 그것을 운영하기 위한 인력이나 기술 등은 내부로부터 공급받는 방식을 취하는데, 후자의 요구에 들어맞는 존재가 바로 기택의 가족과 문광의 가족이 된다. 지상이라는 곳은 21세기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기택의 가족이 삶을 영위하는 반지하라는 곳은 땅 아래이기는 하지만 지상의 공간과 반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지향점 역시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된다. 온전한 지상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생활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일지라도 기택의 가족에게는 그림속의 떡이다. 피자나 양주 같은 것을 마음껏 먹으면서 분위기를 잡고 싶지만 포장지를 접는 알바를 통해 생계비를 벌어야 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 바로 반지하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현재의 우리나라 민초들이 처한 현실을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리 세계가 개방되었다 하더라도 자본 중심의 사회에서 갖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공간인 지하는 자연스럽게 38선 북쪽의 세상으로 연결된다. 서구 세계에 의해 은둔의 나라, 독재의 나라, 반인권의 나라 등으로 불리지만 바깥세상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그 속이 전혀 불편하지 않으며, 편안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가 바로 지하공간이다. ‘박사장집의 지하에 살면서 오직 굳게 닫친 문틀(문광)을 통해서만 외부세계를 접할 수 있는 문광의 남편이 바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곳에 산 지 너무 오래되어 여기서 태어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고향 같은 생각도 든다고 하는 말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작품에 등장하는 지하는 한 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더 깊이 몇 층을 내려간 곳으로 설정된 의미도 곱씹어볼 만하다. 이렇게 설정해 놓고 보면 이 영화에서 왜 지하라는 공간이 등장하며, 그것이 클라이막스로 이끄는 촉매제가 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제 비와 눈이 오는 날과 햇볕이 쨍한 날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자. 햇볕이 쨍한 날이 등장하는 장면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그 장면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박사장가족이 집은 비우고 햇볕 좋은 날이면 문광내외가 거실을 독차지하고 분위기를 잡고 차를 마시면서 노래를 듣는 회상의 순간을 그려내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비로 인해 하지 못했던 다솜의 생일잔치를 하는 정원이다. 이 공간은 기우의 편지에 다시 등장하는데, 많은 돈을 벌어 그 집을 산 다음, 아버지를 기다려서 만나는 곳으로 나온다. 햇볕이 쨍한 날의 정원은 지하에 사는 문광의 남편에게 있어서 평화와 즐거움의 공간이었으나 기택의 가족에게 그것을 빼앗기면서 살육과 비극의 공간이 바뀌었다가 다시 해후의 공간으로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겠지만 위에서 서술한 공간의 의미와 연결시켜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영화의 거의 전 부분을 차지하는 비와 눈이 오는 날이 가지는 의미는 실로 막대하다.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성질을 가진 물이 중심을 이룬다. 하늘에서 내린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비나 눈은 막아내기 어려운 하늘의 조화이지만 지상에 살고 있는 박사장가족은 국제적 감각을 갖춘 설계자가 높은 곳에 지은 튼튼한 집과 미국에서 사온 텐트, 독일에서 들여온 벤츠 자동차 같은 것을 통해 비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피해를 줄이거나 피해갈 수 있다.

이와는 상반되게 반지하에 살고 있는 기택의 가족으로 대표되는 민초들은 비로 인해 생기는 위험과 어려움을 절대로 피해갈 수 없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큰 나라가 가하는 압력과 제재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의 중심에 있는 지상의 사람들은 피해갈 방법을 마련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민초들은 그것으로 인한 어려움을 고스란히 겪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천재지변이나 그에 상응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잠시라도 그것을 피해 박사장의 집으로 들어간 기택의 가족이 잠시 동안 거실에서 파티를 즐기지만 그로 인한 치러야 하는 대가는 너무나 엄청났다. 따라서 기택이 마지막으로 택한 장소가 바로 그 집의 지하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기우충숙은 여전히 반지하 공간에서 생활한다. 그곳에서 기우가 할 수 있는 것은 생계를 위한 알바와 함께 기택의 생사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박사장이 살던 집을 감시하는 것뿐이다. 어느 날 모르스부호를 통해 그가 그곳 지하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후 아버지에게 많은 돈을 벌어 그 집을 사버리겠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쓰면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상을 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런데, 기우가 기택에게 쓴 편지 중에 아주 묘한 표현이 있어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대저택을 산 기우는 어머니와 함께 정원에 있을 것이니 아버지는 지하에서 그냥 걸어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으로 편지를 읽는 기우의 표정으로 보아서는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 수 있을지, 그게 가능하다면 언제가 될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약과 희망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이처럼 암울한 상황에 처한 사회적, 민족적 상황을 우리가 처한 현실보다 더 사실적이면서 냉엄하게 그려내고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에 산수의 경치를 담고 있는 산수경석은 기우에게 넘겨진 이래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의 손을 떠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된다. 홍수가 나서 집이 전부 물에 잠겼을 때도 산수경석은 기우에게 발견되었으며, 공공장소에서 피난생활을 할 때도 기우는 그것을 품에 안고 있었다. 왜 돌을 안고 자느냐고 묻는 기택에게 말하기를, 이 돌이 자신을 자꾸 따라 다닌다고 한다. ‘문광의 가족을 처리하기 위해 박사장의 집에 갈 때도 기우는 산수경석을 들고 갔으며, 그 돌에 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있을 정도로 큰 상처를 입는다. 어떤 고난의 상황에서도 기우가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 산수경석이 가지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민족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한반도이며, 조국이다. 따라서 그것이 비록 말도 없고, 무거우며, 자신에게 큰 상처를 입힐지라도 절대로 그것으로부터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이러한 의도가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을 것이라는 해석은 영화 포스터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들이 각각의 방식으로 정원에 모여 있는 모습인데, 모두 눈을 가린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 모두가 무엇인가에 대해 기생충인 현실에서 그것에 제대로 눈을 뜨면 너무나 참혹한 상황을 자각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기택이 왜 지하로 숨었는가 하는 점이다. 주인공인 기우에게 있어서 기택은 아버지, 할아버지 등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뿌리에 해당하는 존재다. 그 뿌리가 바로 지하의 공간으로 갔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보고 감동받은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 기생충만큼 필자의 마음에 전율에 가까운 감동과 소름을 안겨 준 작품이 없었다고 한다면 너무 과격한 표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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