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플립
부분과 전체의 조화를 통해 인류의 희망을 보여주는 영화, ‘플립’
누구나 성장과정에서 겪게 되는 첫사랑을 소재로 하여 소년과 소녀가 만나서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을 남녀의 두 시선으로 나누어 담담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려낸 영화가 바로 플립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미성년자인 소년, 소녀로부터 나이가 많은 성인 남녀에 이르기까지 누가 보아도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소년과 소녀의 만남과 첫사랑의 과정을 그리기는 했지만 감독이 관객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분과 전체의 제자리 찾기’라는 상당히 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년 소녀의 첫사랑이라는 평범한 소재를 가져다가 자연이 만들어내는 조화와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 사회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면서도 희망을 말하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심도 있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부분과 전체라는 용어가 가지는 의미와 각각의 역할 등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물질과 물질이 결합하여 형성된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가장 일반적인 것이 부분과 전체라는 개념을 통해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부분은 둘 이상으로 나누어놓은 것의 각각을 가리키고, 전체는 둘 이상의 사물현상이 합쳐져서 결합됨으로써 하나로 인식될 수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 그리하여 부분을 합치면 전체가 되고, 전체를 나누면 부분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부분과 전체라는 것은 이처럼 단순하게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첫째, 전체는 부분과 부분이 단순하게 결합함으로써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며, 둘째, 어떤 전체의 부분은 다른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전체가 되며, 전체는 다른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부분이 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모든 사물현상이 부분임과 동시에 전체일 수밖에 없다는 양면성은 우주를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에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분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서 상당한 문제를 야기하는 존재로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위험성과 동시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려는 영화가 ‘플립’이라고 할 수 있는데, 먼저 줄거리를 살펴보자. 브라이스라는 7살 소년은 부모님을 따라 어느 마을로 이사를 온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앞집의 줄리라는 동갑나기 소녀가 달려와서 인사를 건넨다. 너무나 저돌적인 소녀의 행동에 놀란 아버지와 브라이스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시작된 두 아이의 인연은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이어지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면서 진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소년과 소녀의 가족 구성원들 역시 각각의 개성을 보여주면서 등장한다. 두 가족 구성원들의 행동과 삶의 방식이 소년과 소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화해 등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줄거리는 이처럼 단순하지만 이것을 이끌어가기 위해 감독이 요소요소에 배치해 놓은 장치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작품을 한층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좋은 단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그 장치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분석해 보도록 한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장치는 두 개의 가정이다. 두 가정은 사회라는 전체를 이루는 부분이면서 부모와 자식 등의 구성원들이라는 부분이 합쳐진 전체다. 여주인공인 줄리의 집은 사회의 부분이라는 측면보다는 구성원이 모인 전체라는 생각을 중심으로 삶을 영위해가는 가정이고, 브라이스의 집은 구성원이 모인 전체라는 측면보다는 사회의 부분이 가지는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살아가는 가정이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줄리의 아버지는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것과, 그것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자연의 섭리를 통해 딸에게 가르친다. 사회에서 성공한 능력자이면서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는 브라이스의 아버지는 부분, 혹은 개인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지키는 것을 신념으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친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두 가정은 도저히 융합하거나 화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출발한다. 영화가 진행하면서 두 가정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브라이스 가정의 외할아버지와 줄리 가정의 삼촌과 두 오빠가 그들이다. 이들이 바로 전체는 단순히 부분이 모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다.
줄리의 아버지와 삼촌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와 전체의 중요성, 두 오빠가 만들어내는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화음의 멜로디, 줄리를 통해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를 보면서 불과 물 같은 두 가정을 이어주는 할아버지의 역할 등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는 모두 너무나 다른 신념과 환경에서 살고 있는 남녀 주인공이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갈등을 줄여줌으로써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기 위한 훌륭한 장치가 된다.
두 번째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줄리와 브라이스로 대표되는 여성과 남성의 정체성이다. 줄리는 브라이스를 처음 본 순간 그의 깊고 그윽한 눈동자에 끌려서 매우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이것은 브라이스의 눈이라는 부분을 통해 하나의 우주인 사람이라는 전체를 읽어내는 능력이다. 그녀의 이런 능력은 아버지에 의해서 건드려지고 플라타너스 나무를 통해 점차 표면화하면서 전체란 부분이 결합하여 모여 있는 것 이상의 아름다움, 혹은 또 다른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르게 된다.
한편, 부분이 전체보다 우수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으로 뭉쳐진 아버지가 주도하는 가정에서 자란 브라이스는 모든 것을 개별성과 부분성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습관을 형성한다. 브라이스가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실은 줄리가 매일 가져다주는 달걀을 버리는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먹을 수 있는 물건이라는 부분만을 생각하는 브라이스의 가족은 병아리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유정란이라는 전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위생상 불결할 수도 있다는 선입견으로 인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줄리가 주는 달걀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부분만을 강조하면서 전체의 아름다움과 기능 등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성향은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플라타너스 나무를 베어내는 과정에서 보여준 모든 남학생들의 행동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학교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 앞에 있는 나무라는 아주 부분적인 것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줄리가 그 위에서 보았던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분의 수월성에 대한 관념으로 뭉쳐 있는 존재 중 최고는 브라이스의 아버지이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능력이 최고이며, 나머지 것은 부수적이거나 별 볼일 없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탁월한 화음을 내는 줄리의 오빠들을 칭찬하는 브라이스의 누나를 향해 불같은 화를 낸다.
부분과 전체에 대한 논리적인 생각을 체계적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전체의 중요성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존재는 줄리와 줄리의 어머니 그리고 브라이스의 어머니다. 이사 온지 몇 년이 지나도록 전혀 교류가 없었던 두 가정은 브라이스의 어머니가 제안한 저녁 초대에 의해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각 가정의 아버지인 두 사람은 이념적으로는 상반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일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존재가 된다. 두 사람 모두 어느 한쪽만을 강조함으로써 갈등의 불씨를 만들어내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남성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사람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브라이스이며, 여성은 줄리이다. 두 사람이 가진 성적 정체성은 두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인 아버지, 어머니, 누나, 오빠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층 분명하게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부분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여러 가지 갈등을 만들어내는 브라이스와 줄리 사이에 중재자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브라이스의 외할아버지다.
먼저 세상을 떠난 할머니를 그리워하던 외할아버지는 브라이스의 집으로 합류한 날부터 관심을 가진 것은 오직 줄리 뿐이었다. 플라타너스를 지키기 위해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했던 그녀의 행동이 실린 지역 신문의 기사를 본 후 자신의 배우자가 투영된 존재로 인식되면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배우자와 이별하고 부분으로 홀로 남겨진 것이 얼마나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브라이스의 외할아버지인 셈이다. 그는 줄리와의 소통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말과 행동이 거의 없는 상황이 지속된다. 자신의 배우자가 투영된 줄리를 통해 비로소 입을 열게 된 할아버지야 말로 두 가족 모두에게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하고 결국에는 브라이스의 줄리에 대한 사랑을 이루게 함으로써 부분을 전체로 환원시켜 희망을 건져 올리게 만드는 핵심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살펴야할 장치는 자연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플라타너스 나무이다. 수직과 수평으로 이루어진 공간의 특성과 아름다운 조화 등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느 한 부분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는 개별성과 독립성이 강조되는 그냥 나무일뿐이지만 수직과 수평의 조화를 통해 전체를 이루는 조화로운 부분이 됨으로써 희망을 보여주는 상징이 바로 플라타너스이기 때문이다.
세계관의 차이에 의해 파국의 길로 치달을 것만 같았던 줄리와 브라이스의 관계는 외할아버지의 조언과 줄리 아버지의 동조에 의해 극적인 화해를 끌어내게 되고, 소년과 소녀의 우정과 사랑은 뜰 앞에 심은 플라타너스처럼 무한하게 커 나갈 수 있는 희망으로 마무리 된다.
네 번째로 살펴야 할 장치는 두 개의 관점이다. 하나는 브라이스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줄리의 것인데, 브라이스의 시선은 부분을 중심으로 하고 줄리의 시선은 전체를 중심으로 한다. 영화에서는 브라이스의 관점을 먼저 말하고 난 후 줄리의 관점을 나중에 보여주는데, 이것은 부분에서 출발하여 전체로 귀착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는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따라 진행되는데, 브라이스의 관점에서는 부분을 중심으로 사건과 상대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들이 계속된다. 같은 에피소드를 줄리의 관점에서 다시 한 번 보여주지만 여기서는 동일한 내용이 아니라 브라이스의 관점에서는 보여주지 않았던 것들을 첨가함으로써 통합됨과 동시에 전체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된다.
브라이스에 의한 부분으로 조각내기와 줄리에 의한 전체로의 통합이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남녀관계로 치환되면서 이질적이었던 두 개의 관점, 혹은 신념이 새로운 세상을 향한 조화로움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감독은 이러한 진행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두 개의 시선을 고집하는 이유는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존재가 얼핏 부분으로 쪼개진 것 같으면서도 일정한 관계망을 통해 하나로 되는 전체를 추구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서로 다른 것이 만나 새로운 것을 이루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최고의 방법이며, 최고의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전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가정의 줄리와 부분의 우월성을 강조하던 가정의 브라이스라는 두 인물을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아마도 부분의 독자성과 개별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관계성과 특수성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전체라는 아름다움을 플라타너스 나무가 주는 상징을 통해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감독의 희망적인 메시지를 느끼면서 작품을 감상한다면 한층 흥미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