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東方無禮之國
東方無禮之國
외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혹은 우리 민족을 소개할 때 흔히 동방예의지국(東方無禮之國)이라 말하고, 우리 스스로도 그렇게 알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예의를 알고 갖추어서 말하고 행동하는 동방의 나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표현은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주는 한 마디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말을 당당하게 쓸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의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 아니라 동방무례지국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앞의 표현에서 ‘틀림없었다.’라고 하는 어휘 속에는 과거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이미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왜 그렇지 못한가에 대해서는 조금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금방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지킬 줄 모르는 상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작금의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그만큼 우리는 무례한 쪽으로 아주 가까이 와 있는 것이다.
과거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한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예의(禮義)와 염치(廉恥)를 근간으로 하는 자부심과 자긍심은 모두 잃어버리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라는 데에 어느 누구도 토를 달거나 부정을 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신적 황폐화가 심각한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 함께 힘을 모으고 합쳐서 어려움을 극복하자라든지 더 나은 삶과 미래를 위해 함께 노력해보자라든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지가 무척이나 오래되어서 그런 것이 있었나?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민족의 구성원들 중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함께 하는 것보다 혼자서 하는 것이 더 낫고 편하며, 발전적이라고 여기는 오만(傲慢)과 자만(自慢)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예의와 염치가 자리하고 있던 곳에 오만과 자만이 들어서게 되자 어느 사이엔가 사람들은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국가라는 조직에서도 더 이상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게 됨으로써 우리와 민족은 사라지고 개인과 가족만 남게 되었다. 여기서 배운다는 것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한 기본적인 생각과 태도 등을 익히고 배우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 인생에서 볼 때 지식을 습득하는 배움은 전체의 2할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삶의 방법에 대한 배움은 그보다 훨씬 크고 중요한데, 이것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에 이렇게 되자 한 개인이 밖으로 드러내 표현하는 언어나 행위는 모두 나와 가족을 위한 것으로 귀착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사회에서 개인과 가족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잘 보존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큰 테두리를 가진 민족이나 국가가 함께 건재해야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렸거나 외면하게 되었고, 이렇게 되어서는 아주 어렵고 곤란한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렇게 되자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착각에 빠져 기만과 폭력, 부정과 부패, 권력과 금력 등이 판치는 세상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상대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죽여 버리거나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고, 다른 사람이야 죽건 말건 나와 나의 가족, 그리고 내가 속한 조직에 이익이 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모든 행위가 이루어지며, 무슨 일이든 연줄만 있으면 그것을 이용해서 해결하려하는 풍토가 매우 깊숙하게 자리를 잡아 버린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사람들이 꾸준하게 일을 하고 자신의 가정을 돌보며 열심히 사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행복감을 느끼기 위함일 것인데,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의심스러울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함께 해야 한다는 정신이 떠나 버린 자리에 들어선 황폐화된 생각과 행동을 몰아내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감과 동시에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필요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그것을 위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내다 버렸던 예의와 염치를 다시 찾아 정신을 다시 굳건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은 가능한 한 사리사욕을 억제하고, 국가는 국민을 가르쳐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해결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살펴보도록 하자.
천하를 주유하던 공자가 위(衛)나라에 갔을 때 염유(冉有)라는 제자가 선생님 시중을 들면서 수레를 몰았다. 공자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아주 많구나”라고 했다. 염유가 선생께 묻기를, “백성들이 많으면 다음에는 무엇을 더 해야 할까요?” 답하기를, “잘 살게 해야 한다.” 다시 묻기를, “그 다음에는 무엇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 답하기를,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모든 것의 핵심이기 때문에 공자는 사람이 많은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설파했는데,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상황에 잘 부합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백성들이 부유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공자는 말했다. 과거에 비해 현재의 우리는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가 말한 두 번째의 단계까지는 그런대로 잘 이행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문제는 세 번째 단계인데, 이 부분에서 우리 모두가 손을 놓아 버림으로써 선진국의 단계로 진입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르친다는 것은 일정한 목적 아래 습득해야 하는 지식을 불어넣는 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지키고 갖추어야 할 다양한 덕목들은 익혀서 실생활에서 실천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의 중심에 바로 예의와 염치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만든 사회는 이 네 가지가 제대로 갖추어지기만 하면 나머지 것들은 부수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제(齊)나라 재상을 지낸 관중(管仲)이 나라를 다스리는 네 개의 근본 덕목(四維)으로 예의염치를 들어서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예의염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예(禮)는 제사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서 신(神)에게 모든 정성을 다해 바침으로써 상대를 즐겁게 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글자다. 그렇기 때문에 예라고 하는 것은 상대를 즐겁게 하는 일체의 언어나 행동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예를 갖추거나 지킨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 존경, 사랑, 배려, 숭배, 바침 등을 중심으로 하는 언어와 행동을 하는 것이 되어 갈등이나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서로가 편안하고 즐거우면서도 필요로 하는 것을 얻는 그런 상황을 만드는 기본이 된다. 누구에게나 제대로 된 예를 갖추기만 하면 싸우거나 욕하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하는 따위의 일이 발생하는 빈도가 아주 많이 줄어들거나 없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에게 예로 대하고, 아내 역시 남편에게 예로 대하며, 백성은 통치자에게 예로 대하고, 통치자 역시 백성을 예로 대하며, 어른은 아이를 예로 대하고, 아이 역시 어른을 예로 대한다면 협력이나 협동, 협치 같은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물 흐르듯이 편안한 상태로 만들어져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자리를 정확하게 알고, 상대의 지위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가장 훌륭한 예가 될 것이니 지금 우리에게 이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을 예로 대하면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죽이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생명체를 예로 대한다면 반려동물에 대한 학대도 함부로 행하기 어려울 것이며, 국민을 예로 대하고 생각한다면 특권을 멋대로 휘두르거나 부정과 부패를 함부로 일삼기 어려울 것이니 우리 사회는 점차 맑고 깨끗한 환경으로 바뀌어갈 것이 분명하다.
의(義)는 좌우가 균등하게 나누어져 있는 상태인 공평함을 뜻으로 하는 양(羊)과 손(手)으로 창(戈)을 잡고 자기 자신을 굳건하게 지킨다는 뜻을 가진 나(我)가 합해져서 이루어진 글자다. 물론 양(羊)은 제사에 바치는 희생물로 보기도 하지만 이 글자에서는 위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의는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마땅한 도덕, 도리, 행위 등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또한 사람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기도 한다. 즉, 사람의 마음속에만 있으면서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을 정(情)이라 하고, 어떤 형태로든 밖으로 드러나 상대에게 전달된 것을 의(意)라 하며, 밖으로 드러나 외부로 전달되고 난 후에 그것을 전달받은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을 의(義)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는 옳다는 뜻을 가지게 된다.
일정한 범주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하거나 옳다고 여기는 공정한 도리, 정직한 행동 같은 것이 바로 의이기 때문에 예(禮)와 마찬가지로 의(義)도 상대를 향한 것이며, 상대에 의해 정당성과 존재 이유 등이 판가름 나는 그런 덕목이 된다. 또한 누군가가 말한 것이나 행동을 한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바로 의이기 때문에 상대를 존중하며 인정함으로써 갈등이나 다툼 등을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는 것도 역시 의가 된다. 따라서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 의가 잘 행해져서 실천되기만 하면 그 사회 역시 바람직하고 올바른 방향을 잡아서 발전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 틀림없다. 특히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의를 잘 지키고 실행한다면 우리나라는 한층 밝고 행복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렴(廉)은 사람이 살림을 하는 집을 나타내는 엄(广)과 손에 두 개를 잡고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겸(兼)이 합쳐진 글자로 집의 옆면을 나타낸다. 집의 옆면을 나타내는 글자인 렴(廉)이 정직, 강직, 품행방정 등의 뜻을 가지게 된 데에는 옛날 사회 제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집의 옆면이라는 말은 그것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을 나타내기 때문에 주택의 바깥 옆면을 가리킨다. 고대국가 제도에서 천자의 집(堂) 옆면의 높이는 2.8미터 정도이고, 제후(諸侯)의 높이는 2.1미터이며, 큰 부자 집(大戶)의 방 높이는 1.5이고, 선비(士)의 집 높이는 0.9미터로 규격을 정했다고 한다. 즉, 각자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 집이나 소유하는 것 등의 제한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글자가 바로 렴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렴은 정치를 하거나 관직에 나아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분수를 지키면서 그것에 맞도록 사는 것을 가리키게 됨으로써 청렴, 강직, 맑음, 고매한 행실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되었다. 권력을 악용하여 많은 재산을 모으고, 부정과 부패를 일삼다가 법에 저촉되어 처벌을 받는 고위 공직자들의 소식이 하루가 멀다 않고 들려오는 것은 모두 이 렴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직자의 렴이 제대로 지켜지면 그것을 본 국민들은 그들을 믿고 편안한 삶을 살면서 사리사욕을 생각하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할 것이니 어떤 면에서는 국가 조직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치(恥)는 마음을 나타내는 심(心)과 귀를 의미하는 이(耳)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글자이다. 사람은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거나 좋지 않은 행동을 한 것이 있어서 그것이 상대에 의해 들키거나 지적을 당했을 때는 마음에 자극을 받아서 자신도 모르게 귀는 빨갛게 되고, 얼굴에는 열이 오르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치는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했거나 자신만 알고 있던 좋지 못한 어떤 것이 알려지게 되었을 때 스스로가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것을 표현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말로는 부끄러움, 수치, 모욕 등으로 이해하면 되는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얼굴은 사람이지만 마음은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人面獸心)는 말을 하기도 한다. 부끄러움이라는 뜻을 가진 치(恥)를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첫째, 남의 것을 빼앗을 생각을 하지 않으며, 둘째,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지 않으며, 셋째,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하지 않으며, 넷째, 자신의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가지지 않으며, 다섯째, 올바르거나 착한 행동과 말을 하려고 애쓰며, 여섯째, 스스로를 닦아 떳떳하도록 노력하는 자세를 보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움을 알며, 그런 마음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살아간다면 남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굴거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욕심내거나 하는 짓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사회로 될 것이 확실하다. 지금과 같은 환경을 잘 유지하면서 스스로가 내다 버린 예의염치를 다시 찾아오기만 한다면 우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은 멀지 않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예의염치를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시도를 누가 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차원이 아니라 분명한 신념과 지도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조직이 이 일을 주도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데, 현대사회의 성격으로 볼 때 정치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국회와 통치의 중심인 행정 조직을 이끄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몸소 실천하여 모범을 보임과 동시에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하나하나 바꾸어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잃어버린 예의염치를 다시 찾아 우리 마음속에 굳건하게 갈무리하여 늘 갈고 닦음으로써 과거에 우리 선조들이 노력해서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유산인 동방예의지국을 회복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현재의 우리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후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조들에게서는 자랑스러운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후손들에게는 자랑스럽지 못한 유산을 남겨 준다면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